한치형(韓致亨, 1434년 ~ 1502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통지(通之)·형지(亨之), 시호는 질경(質景)이다. 조선 왕조의 외척 가문 출신으로, 네 임금(세조·예종·성종·연산군)을 섬기며 최고 관직인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올랐다.
가문과 배경
한치형은 한영(韓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영정(韓永矴)이며, 아버지는 한절(韓𥑇)이다. 백부는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韓確)으로, 한치형은 소혜왕후의 사촌 오빠에 해당한다. 또한 세종의 아들인 양녕대군의 사위이기도 하다. 친고모 두 명이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한 명은 영락제의 후궁(여비), 다른 한 명은 선덕제의 후궁(공신부인)이 되었다.
한치형의 증조부 한영은 고려 시대 신호위녹사를 지냈으나 홍륜의 난에 연루되어 사형당했고, 조선 건국 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종고조부 한공의(韓公義)는 한명회의 고조부로, 한치형과 한명회는 10촌 간이다.
관직 생활
1451년(문종 1) 18세에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랐다. 이후 감찰, 장령,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 등을 거쳐 1455년 좌익원종공신 3등에 녹선되었다.
1467년(세조 13) 장례원판결사가 되었고, 같은 해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에 특승되었다. 이후 예종 즉위 직후 함길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호조참판으로 복귀하였다. 성종 즉위 후에는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어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으며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그 뒤 개성부유수, 경기도관찰사,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481년 좌참찬에 올랐다. 연산군 즉위 직후 좌찬성 겸 대사헌을 지내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00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와 관련해서는 친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 관계로, 성종 때 주청사·성절사·사은사 등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황제의 환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주요 역사적 사건과의 관계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에는 좌의정으로서 유자광(柳子光),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 인사들의 처형에 관여하였다. 반면 연산군의 국정 운영에 대해서는 누차 검소와 절용을 아뢰다가 왕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502년(연산군 8) 영의정으로 재직 중 사망하였으며, 시호 질경(質景)이 추서되었다. 사후인 1504년(갑자사화)에, 일찍이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의 폐출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되고 일가가 몰살당하였다. 그의 서자 한수(韓遂) 역시 처형되었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신원(伸冤)되었다.
평가
졸기에 기록된 사관의 인물평에 따르면, 성품이 순박하고 침착하며 말이 적었고, 겉을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직에서는 사의(私意)로 법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학술이 부족하여 일을 만나면 막히는 경우가 많았다는 평가도 함께 남아 있다. 큰 공적은 없었으나 드러난 과실도 없었다는 중립적인 평가가 주요 기록에 나타난다.
관련 기록
한치형에 관한 사료로는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국조인물고』, 『연려실기술』 등이 있으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별도의 항목으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