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조약(漢城條約)은 1884년(고종 21)에 발생한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1884년 음력 11월 24일, 즉 양력 1885년 1월 9일에 조선의 한성부(漢城府)에서 조인되었다. 조선 측 전권대신은 의정부 좌의정 김홍집(金弘集)이었고, 일본 측 전권대신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다.
역사적 배경
갑신정변은 조선·청나라·일본의 정치적 국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정변을 진압하고 권력을 회복한 민씨 정권은 일본이 정변에 개입한 사실에 대해 항의하고, 정변의 중심 인물인 김옥균 등의 인도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한편 청나라는 당시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국제 분쟁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갑신정변으로 인한 청·일 충돌을 평화적으로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성 시민들의 배일 감정으로 일본 공사관이 소각되고 일본인 희생자가 발생하자,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에 압도당하던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강경책을 취하였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사죄,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지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병력과 군함을 파견하여 무력을 배경으로 교섭을 전개하였다. 1884년 11월 18일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가 대부대를 이끌고 한성에 들어오자, 조선은 좌의정 김홍집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22일부터 협상에 들어갔다.
조약의 주요 내용
한성조약은 총 5개조와 별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조: 조선국은 국서(國書)를 일본에 보내어 사의(謝意)를 표명한다.
- 제2조: 일본국 피해 인민의 유족 및 부상자를 휼급하고, 상민의 화물이 훼손·약탈된 것을 보전하기 위해 조선국에서 10만 원을 지불한다.
- 제3조: 이소바야시(磯林)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사문(査問) 나포하여 엄벌에 처한다.
- 제4조: 일본 공관을 신기지로 이축하는 것을 요구하며, 조선국은 기지 방옥을 교부하여 공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수축·증건에 대해 조선국이 다시 2만 원을 지불한다.
- 제5조: 일본 호위병의 영사(營舍)는 공관 부지를 택하여 정하고, 임오속약(제물포조약) 제5관에 비추어 시행한다.
별단에서는 제2조와 제4조의 금액을 일본 화폐로 계산하며 3개월을 기한으로 인천에서 완불할 것, 제3조의 흉도를 입약 이후 20일을 기한으로 처단할 것을 규정하였다.
협상 과정에서 일본이 요구한 조건 가운데 공사관 건축비는 반감되어 2만 원으로 조정되었고, 공사관 호위병을 1,000명씩 주둔시킨다는 조항은 삭제되었으나, 대체로 일본 측 요구대로 타결되었다. 김옥균 등의 인도 요구는 거절되었다.
의의와 평가
갑신정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양국 관계는 매우 긴장된 상태였고, 일본의 입장은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본은 오히려 무력을 앞세워 한성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청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불평등 조약으로 평가되며, 이후 1885년 4월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톈진조약(天津條約)과 함께 당시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