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한사군(漢四郡)은 기원전 108년,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네 개의 군(郡)을 가리킨다. 한군현(漢郡縣)이라고도 불리며, 구성은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진번군(眞番郡)·현도군(玄菟郡)이다.
설치 배경 및 경과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무제 시기에 동방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이는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세력을 유지하던 위만조선과 충돌하는 결과를 낳았고,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점령지에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사기》〈조선열전〉에는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구체적 군명은 명시되지 않았고, 《한서》〈조선전〉에서 비로소 네 군의 명칭이 확인된다.
변천 과정
4군은 동시에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짧은 기간 안에 축소·통폐합되었다.
- 기원전 82년(전한 소제 시원 5년): 진번군이 낙랑군에, 임둔군이 현도군에 각각 병합되었다.
- 기원전 75년(전한 소제 원봉 6년): 토착 세력의 저항으로 현도군의 치소(治所)가 고구려현에서 혼하(渾河) 상류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이 과정에서 현도군에 병합되었던 임둔군의 옛 땅은 낙랑군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처음 설치된 4군 중 진번군과 임둔군은 약 25년 만에 소멸되었고, 현도군도 본래 지역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낙랑군만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이후 후한 시기를 거쳐 313년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멸망할 때까지 약 420년간 존속하였다. 다만 후한 말기인 3세기 초, 요동 지역의 군벌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 남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한 바 있다.
성격에 대한 논의
한국 사학계에서는 한사군이라는 역사 용어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져 왔다. 일제강점기 일본 관학 사학자들은 조선사의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사군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이들은 조선의 역사가 외부의 침입과 영향에 의해 진행되는 타율적 역사이며, 따라서 선진 문물을 가진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논리를 펴기 위해 한사군을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광복 이후 연구에 따르면, 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약 25년에 불과하며, 가장 오래 지속된 낙랑군도 후기에는 대동강 유역의 좁은 지역에 국한되어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한나라가 멸망(220년)한 이후의 낙랑군은 한나라와 무관한 시기의 존재였다. 낙랑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통치 기구라기보다는 중국 대륙과의 무역·통신 업무를 수행하는 상업적 기능이 강한 조계지(租界地)에 가까웠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낙랑계 고분이 평양 근처에 집중 분포하는 고고학적 사실이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다.
위치에 관한 논란
한사군, 특히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 논쟁이 존재한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고려·조선시대의 학자들은 낙랑군을 평양 일대로 비정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평양 일대에서 봉니(封泥), 한식 무덤, 한대 화폐 등 관련 유물이 대량 발굴됨에 따라 현재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일대로 본다. 반면, 신채호 등의 민족사학자 및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군이 요동 일대나 그보다 서쪽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나, 주류 사학계는 이러한 주장이 고고학적 증거를 무시한 문헌 해석에 기반한 것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한서》 지리지의 하천 기록 분석을 통해 낙랑군을 요동반도 지역에 비정하는 학술 연구도 발표되었다.
영향
한사군이 한반도 주변 토착 사회에 끼친 영향으로는 철기 문화의 전파와 중국과의 교역 경로 형성 등이 꼽힌다. 낙랑군을 중심으로 한 한대 문물이 주변 지역에 유입되었으며, 김해 패총과 경주 일대에서도 한대 화폐와 금속기가 출토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에서는 한사군이 동북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입장을 취하며, 관련 서술을 축소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