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화 검열은 한국 영화의 역사와 함께해 온 제도적 통제 장치로, 일제강점기부터 군사정권 시기를 거쳐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로 정부는 영화의 제작과 상영에 관한 엄격한 규정을 시행하였으며, 이는 한국 영화 산업의 발전과 표현의 자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1910~1945)
한국에 영화가 도입된 것은 1897년 이후였으며,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검열이 시행되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1920년 활동규제위원회를, 1922년에는 공연규제규칙을 제정하였다. 1926년에는 영화검열규정이 도입되어 모든 국내외 영화가 상영 전에 일본 경찰의 심사를 받도록 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영화법이 제정되어 영화 산업에 대한 면허제와 사전 제한 조치가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일본의 이미지를 훼손하거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영화가 금지되었으며, 홍계명 감독의 <블러디 호스>(1928), 이규환 감독의 <임재없는 나룻배>(1932) 등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해방 이후~1960년대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영화 검열은 계속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 이념이 강조되었고, 좌파 인력의 배제를 통한 검열이 이루어졌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전국영화윤리위원회가 설립되어 정부의 직접적 감시 없이 영화를 평가하는 최초의 공공기관이 생겼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개정된 헌법에는 공공도덕과 사회윤리를 위해 정부가 영화를 검열할 수 있다는 조항이 명시되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은 사회 비판적 내용으로 인해 검열을 받았으며,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1965)는 북한군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1980년대 군사정권 시기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영화 검열이 가장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1973년 영화진흥공사(MPPC)가 설립되었으나, 이는 영화 산업 지원보다는 반정부 정서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MPPC는 면허제도, 제작 영화 수 제한, 수입 할당량, 강력한 검열 등을 통해 시장을 통제하였다. 이 시기 모든 영화는 촬영 전과 촬영 후 두 차례의 정부 검열을 통과해야 했으며, 영화의 80% 이상이 촬영 전에 수정을 거쳐야 했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은 대본의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약 30분 분량이 잘려나갔고, 이원세 감독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도 검열 대상이 되었다. 영화인들은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면만을 그려낼 수 있었으며, 이는 한국 영화 산업의 질적 저하와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1990년대 이후: 검열에서 등급제로의 전환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공산권 영화 수입이 가능해지고 에로티시즘에 대한 검열 정책이 일부 완화되었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1996년 9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크래시>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10분 분량 삭제된 채 상영되어 논란이 일었다. 같은 해 10월, 헌법재판소는 영화 사전심의 제도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위헌 판결(영화검열사건)을 내렸다. 이에 따라 영화법이 개정되었고, 19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설립되어 사전 검열 대신 등급 분류 제도가 도입되었다. 현재 한국의 영화 등급은 G(전체관람가), PG-12(12세 관람가), PG-15(15세 관람가), R-18(청소년 관람불가), 제한상영가의 5단계로 운영된다.
그러나 등급제 도입 이후에도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었다. 1999년 영화 <노란 머리>는 최초로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고, <거짓말>은 등급 보류 처분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2010년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1분 30초 분량을 삭제해야 극장 상영이 가능했다. 2014년에는 영화 <인터뷰>가 북한 지도자를 살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국내 상영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평가와 의의
한국의 영화 검열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국가 권력이 대중문화를 통제하고 자신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많은 영화인들이 검열로 인해 창작의 자유를 침해당했으며, 이는 한국 영화 산업의 발전을 지체시킨 요인으로 평가된다.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 이후 사전 검열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등급 분류 제도를 둘러싼 논의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