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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줏사이

하야시 줏사이(일본어: 林述斎, はやし じゅっさい, 1768년 8월 5일 ~ 1841년 8월 30일)는 일본 에도 시대 후기의 유학자이다. 하야시 집안(林家)의 제8대 당주로, 하야시 집안의 중흥조로 평가받는다.

생애 초기 배경으로, 하야시 줏사이는 미노(美濃) 이와무라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히로(松平乗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교호 개혁을 추진한 로주(老中) 마쓰다이라 노리사토(松平乗邑)이다. 본명은 처음 마쓰다이라 노리히라(乗衡)였으며, 이후 하야시 집안에 입적되면서 하야시 다이라(衡)로 개명하였다. 호는 줏사이 외에도 쇼겐(蕉軒), 쇼가(蕉隠) 등이 있었다.

간세이 5년(1793년), 하야시 긴포(林錦峯)의 사망으로 하야시 집안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막부의 명으로 하야시 집안에 양자로 입적하여 당주가 되었다. 이후 대학두(大学頭)가 되어 막부의 문서 행정과 교육의 중추에 참여하였다. 시바노 리쓰잔(柴野栗山),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비토 지슈(尾藤二洲) 등 간세이 삼학사라 불리는 인물들과 함께 유학의 교학 쇄신에 힘을 쏟았으며, 기존의 쇼헤이코(昌平黌)를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로 개편하고 막부 직할화를 추진하였다(간세이 이학 금령).

학문적 성향은 주자학을 토대로 하면서도 청(淸)나라의 고증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막부의 편찬 사업으로는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 『조야구문부고』(朝野旧聞裒藁), 『신편 무사시 풍토기고』(新編武蔵風土記稿) 등을 주도하였다. 다만 이들 편찬 작업에서 줏사이의 역할은 자료 선별이나 집필 체제 지도에 머물렀고, 실제 집필은 각 분담자에게 일임되었다.

문학·학술 방면에서는 일본과 중국 고금의 시재에 뛰어나 가집 『가원만금』(家園漫吟)을 남겼다. 또한 중국에서 산일되어 전하지 않는 서적을 모은 『일존총서』(佚存叢書)는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외 관계 측면에서 분카(文化) 연간에는 조선 통신사의 응접을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행하도록 하는 빙례(聘礼) 개혁에 관여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전래된 조선의 서적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을 제자 오고 요시노리(大鄕良則)에게 명하여 초서 원본을 탈초하도록 한 일도 기록되어 있다.

문하 제자로는 사토 잇사이(佐藤一斎), 마쓰자키 고도(松崎慊堂) 등이 이름을 날렸으며, 이베 고잔(井部香山), 가사이 인제(葛西因是), 아오바 한잔(青葉半山) 등도 줏사이의 문인이었다.

가족으로는 적남 하야시 데이우(林檉宇)가 사후 하야시 집안을 이었고, 3남은 도리이 요조(鳥居耀蔵), 6남은 하야시 후쿠사이(林復斎)였다. 1915년(다이쇼 4년) 종4위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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