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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호키치

하나와 호키치(塙保己一, 1746년 6월 23일~1821년 10월 7일)는 일본 에도 시대의 국학자이자 승려이다. 일본의 군서(群書)를 집대성한《군서유종》(群書類従)과《속군서유종》(続群書類従)의 편찬자로 알려져 있다. 일본 역사학과 문헌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실명(失明) 상태에서도 방대한 문헌 편찬 사업을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

하나와 호키치는 무사시국 고다마군 호키노무라(保木野村, 현재의 사이타마현 혼조시 일대)의 농민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은 오기노(荻野)씨였으며, 아명은 도라노스케(寅之助)였다. 이후 이름을 다쓰노스케(辰之助), 센야(千弥), 호키노이치(保木野一) 등으로 여러 차례 바꾸었으며, 스승인 아메토미 검교의 본성을 이어 받아 하나와(塙)씨를 사용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으며, 5세 무렵 신경질환으로 인한 눈병으로 시력이 점차 약해져 7세가 되던 해에 실명하였다. 실명 이후 손바닥에 글자를 받아 쓰는 방식으로 문자를 익혔고, 뛰어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학문을 쌓아간 것으로 전해진다.

15세 무렵 에도(江戶)로 나가 맹인 직업 단체인 당도좌(当道座)의 아메토미 검교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안마·침술·음곡 등의 수업을 받았으나 재능이 없었고, 이후 학문의 길로 전환하게 되었다. 일본학·화가(和歌)·한학·신도·율령·의학 등 여러 분야를 스승들로부터 배웠으며, 가모노 마부치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주요 업적

하나와 호키치의 대표적인 업적은《군서유종》의 편찬이다. 이것은 일본의 고전 문헌을 분야별로 모아 정리한 방대한 총서로, 일본 국학 연구의 기초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를 위해 그는 간세이 5년(1793년)에 막부의 허가를 받아 일본학 상담소(和学講談所)를 개설하고, 다양한 기록과 문서를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또한 역사 사료의 편찬 사업에도 관여하였으며, 이 작업은 이후 도쿄대학 사료편찬소로 이어졌다.

그 밖에도《일본후기》(日本後紀)의 일부 산일(散逸)된 내용을 재발견하는 성과를 냈으며, 《화계전》(花咲伝) 등의 저술을 남겼다.

말년과 사후

검교(検校)와 총검교(総検校)의 지위에 올랐으며, 분세이 4년(1821년)에 76세로 사망하였다. 넷째 아들인 하나와 다다토미는 국학자로 활동하였다. 생가는 현재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묘소는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다. 2010년부터는 사이타마현 혼조시에서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현저한 활약을 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하나와 호키치상"이 제정되어 운영되고 있다.

미국의 사회 운동가 헬렌 켈러가 1937년 일본 방문 시 하나와 호키치의 기념관을 찾아 그의 업적을 기린 일화가 전해진다.

참고 사항

한국어 표기에서는 "하나와 호키치"와 "하나와 호키이치" 두 표기가 모두 사용되며, 일본어 발음과 국립국어원 표기 규정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본 항목은 한국어 위키백과와 일본어 및 영어 위키백과, 국학원대학 디지털뮤지엄 등 공신력 있는 출처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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