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하기의 난

하기의 난(萩の乱)은 1876년(메이지 9년)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萩) 지역에서 메이지 신정부에 맞서 일어난 사족(士族) 반란이다. 메이지 정부 초기의 일련의 사족 반란 중 하나로, 조슈번(長州藩) 출신의 옛 사무라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배경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 제국이 수립되고 에도 막부가 무너진 이후, 신정부는 봉건 제도를 해체하는 일련의 근대화·서구화 정책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폐번치현과 사족의 특권 폐지, 징병제 도입 등이 이루어지면서 기존 사무라이 계급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상실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불만을 품은 보수적 사족들 사이에서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에 기반한 반정부 운동이 확산되었다.

하기의 난의 지도자인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문하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조슈번 출신 사무라이로서 신정부에서 참의(参議)와 육군 경무관 등을 지냈으나, 폐번치현 이후의 정책을 둘러싼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등과의 의견 대립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경과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현에서 신푸렌의 난(神風連の乱)이 발생하고, 10월 27일 후쿠오카현에서 아키즈키의 난(秋月の乱)이 발생했다. 마에바라 잇세이는 이에 호응하여 야마구치현 하기에서 거병을 준비했다. 그는 현 정부청사에 대한 기습 공격을 계획했으나, 야마구치현 지사가 이 소식을 사전에 파악하고 정부군을 증원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계획이 노출된 후 마에바라 일행은 전략을 변경하여 일본해 연안을 따라 도쿄로 행진하며 각지의 불만 사족들을 규합하려 했다. '순국군'(殉国軍)이라 자칭한 반란군은 하기에서 스사(須佐) 방면으로 이동하며 약 300명 규모로 늘어났으나, 악천후와 탄약 부족, 지역 주민들의 민심 이반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비축해 두었던 탄약이 누군가에 의해 연못에 폐기된 것으로 알려져 장기전이 불가능해졌다.

11월 5일, 마에바라와 핵심 간부들은 도쿄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시마네현에서 체포되었고, 하기에 남은 반란군은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결과

마에바라 잇세이를 비롯한 핵심 간부들은 12월 3일 처형되었다. 처벌의 법적 근거는 1876년 11월 8일 제정된 폭도처분 임시 시행령(臨時暴徒処分例)이었다. 연루자들에 대한 처벌 규모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징역 수십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록이 존재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마에바라의 스승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는 연좌되어 폐교되었으며, 관련 인물들이 처벌을 받았다. 다만 쇼카손주쿠는 이후 1880년경 재건되었다가 다시 폐교되기까지 후진 양성에 역할을 하였다.

의의

하기의 난은 메이지 정부 초기 규슈와 서일본 지역에서 잇따라 발생한 사족 반란의 하나로, 이후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으로 이어지는 사족 불만 운동의 흐름 속에 위치한다. 이 반란은 신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대한 보수적 사족들의 저항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일본 근대사에서 다루어진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