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재우(畢再遇, 1148년~1217년)는 중국 남송(南宋) 시기의 군인이다. 자는 덕경(德卿)이며, 출신지는 산동성 연주(兗州)이다. 중국어 간체자 표기는 毕再遇, 정체자 표기는 畢再遇이며, 병음 표기는 bì zài yù이다.
필재우는 무의대부(武義大夫)였던 아버지 필진(畢進)의 아들로, 음보(蔭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처음에는 시위마군사(侍衛馬軍司)에 소속되었다. 그는 무예가 뛰어나 양손을 모두 사용하여 활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순희(淳熙) 연간(1174년~1189년)에는 용력으로 이름을 날려 효종으로부터 전포와 금전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가장 두드러진 활약은 개희 2년(1206년) 권신 한탁주(韓侂胄)가 주도한 북벌 당시의 전공이다. 필재우는 통제 진효경(陳孝慶)과 함께 사주(泗州)를 공격하여 동서 두 성을 모두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금(金)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금군이 그의 이름만 듣고도 도주할 정도로 위명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특히 육합(六合) 전투에서는 성중의 화살이 바닥나자 우산을 모아 적군으로 하여금 화살을 쏘게 유도하여 약 20여 만 개의 화살을 회수하는 전술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개희북벌이 실패로 끝난 후 가정(嘉定) 원년(1208년) 가정화의(嘉定和議)가 체결되면서 귀향 명령을 받았으나, 송 영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여러 관직을 내렸다. 가정 10년(1217년) 금군이 재차 남하할 당시 무신군 절도사로 승진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같은 해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후 태위(太尉), 태사(太師)가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금군이 그를 두려워했으며 항저우에 묘소가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역사적으로 필재우는 중국 정사(正史)인 《송사》(宋史) 열전(列傳) 제402권에 수록되어 있어, 남송의 주요 장수 중 한 명으로서의 지위가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