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렐로 헨리 라과디아(Fiorello Henry La Guardia, 1882년 12월 11일 ~ 1947년 9월 20일)는 미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1934년부터 1945년까지 3선에 걸쳐 제99대 뉴욕 시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생애 초기
라과디아는 1882년 12월 11일 뉴욕주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아버지 아킬레 라과디아와 유대계 어머니 아이린 쿤 라과디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피오렐로 라파엘레 엔리코 라과디아(Fiorello Raffaele Enrico La Guardia)였으며, 이후 미들 네임을 영어식인 헨리(Henry)로 변경하였다. 어린 시절을 애리조나주에서 보냈고, 이후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트리에스테에서 생활하였다. 미국 영사관에서 근무하며 여러 언어를 습득하였고, 이후 뉴욕으로 돌아와 뉴욕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1910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정치 경력
라과디아는 공화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16년 뉴욕 제14선거구에서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917년부터 1919년까지 재임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 육군 항공대에서 소령으로 복무하였다. 1923년부터 1933년까지 다시 뉴욕 제20선거구의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하원의원 시절 진보적 성향의 입법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노동자의 단결권을 보호하고 황견계약(yellow-dog contract)을 금지하는 노리스-라과디아 법(Norris-La Guardia Act)을 공동 발의하여 1932년 통과시켰다.
뉴욕 시장 재임
1933년 선거에서 융합당(Fusion Party)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34년 1월 1일 뉴욕 시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37년과 1941년 재선에 성공하여 1945년까지 3선을 역임하였다.
라과디아의 시장 재임 기간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격변기와 맞물려 있었다. 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과 협력하여 막대한 연방 자금을 뉴욕시로 유치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인프라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의 임기 동안 2,000마일 이상의 도로 보수, 3개의 주요 교량, 92개의 학교, 255개의 놀이터, 17개의 수영장, 13개의 공공 주택 단지 등이 건설되었으며, 뉴욕 지방 자치 공항(훗날 라과디아 공항으로 명명)도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라과디아는 부패한 정치 조직 태머니 홀(Tammany Hall)과의 투쟁으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시 정부의 인사 제도를 실적제로 전환하고, 소수 민족에 대한 공직 기회를 확대하였다. 또한 청렴하고 효율적인 시정 운영으로 '뉴욕의 작은 거인(Little Flow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판사 시절과 유명한 일화
시장이 되기 전 치안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굶주린 노인이 빵을 훔친 사건을 재판한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라과디아는 노인에게 10달러의 벌금을 선고하면서도, 법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노인에게 벌금을 부과하오. 그러나 이 법정에 있는 여러분 각자에게 50센트씩을 걷어 그 벌금을 대신 내겠소. 빵을 훔치게 만든 이 도시의 무관심이야말로 진정한 죄인이기 때문이오"라고 말하며 자신의 주머니에서 10달러를 내고 방청객들로부터 추가로 돈을 모아 노인에게 건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말년과 사망
1946년 시장직을 마친 후, 라과디아는 유엔 구제·재활 행정국(UNRRA)의 국장을 잠시 역임하였다. 1947년 9월 20일 뉴욕 브롱크스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하였으며, 브롱크스의 우들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산
라과디아의 이름을 기려 뉴욕 퀸스에 위치한 라과디아 공항(LaGuardia Airport)이 명명되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청렴성과 진보적 개혁 정책으로 현대 뉴욕시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