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드 투르농 (프랑스어: François de Tournon, 1489년 7월 28일 – 1562년 4월 22일)은 16세기 프랑스의 추기경, 외교관, 정치가였다.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 왕국의 주요 고문이자 외교 정책을 담당했던 인물로, 갈리아 교회 문제와 종교 개혁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애 및 경력 오베르뉴(Auvergne) 지역의 귀족 가문 출신인 투르농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투신했다. 1518년 엠브렁(Embrun)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이후 1525년 부르주(Bourges) 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뛰어난 지성과 외교적 수완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눈에 띄게 되었고, 1530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외교 및 정치 활동 추기경 투르농은 프랑수아 1세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으며, 왕국의 주요 외교관으로서 유럽 각지를 누볐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와의 복잡한 관계를 조율하고, 이탈리아 전쟁(Italian Wars)과 관련된 협상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1516년 교황 레오 10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체결된 볼로냐 콩코르다(Concordat of Bologna)의 협상 과정에도 참여하여 프랑스 교회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교황청과 잉글랜드, 독일 제후국들 사이를 오가며 프랑스의 국익을 대변했으며, 심지어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외교 시도에도 관여했다. 프랑스 국내에서도 왕의 최고 고문으로서 재정 및 행정 문제에 대한 자문을 제공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종교 개혁과 갈리아 교회 투르농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강력한 옹호자로서 종교 개혁에 반대했다. 그는 프랑스 내에서 확산되던 프로테스탄티즘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 교회의 독립성(갈리아 교회주의)을 주장하며 로마 교황청의 지나친 간섭을 견제하려 노력했다. 그는 트렌토 공의회(Council of Trent)의 개최를 지지했지만, 프랑스의 국익과 교회의 전통을 고려한 입장을 취했다.
말년 앙리 2세 치하에서도 투르농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프랑스 종교 전쟁(Wars of Religion)이 발발하기 직전인 1562년 4월 22일 생 제르맹 앙 레(Saint-Germain-en-Laye)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고향인 투르농(Tournon-sur-Rhône)에 안장되었다.
평가 프랑수아 드 투르농은 뛰어난 지성, 탁월한 외교적 수완, 그리고 확고한 신념으로 16세기 프랑스의 외교와 종교 정책을 이끌었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격동의 시대에 프랑스의 국익을 수호하고 교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헌신했으며,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외교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또한, 그는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