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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기조

프랑수아 피에르 기욤 기조(François Pierre Guillaume Guizot, 1787년 10월 4일 ~ 1874년 9월 12일)는 19세기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이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수립된 7월 왕정(오를레앙 왕조) 시기 보수적 입헌군주파의 지도자로서 주요 장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847년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의 국무회의 의장(총리)을 지냈다.

생애 및 배경

프랑스 남부 님(Nîmes)에서 위그노(프로테스탄트)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앙드레 기조는 변호사였으나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치 시절 지롱드파를 지지한 이유로 1794년 처형당했다. 이후 어머니 엘리자베트 소피 보니셀의 주도 아래 제네바로 망명하여 교육을 받았고, 1805년 파리로 돌아와 법학을 공부하였다. 1812년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를 번역하여 학계에 이름을 알렸고, 같은 해 소르본 대학의 근세사 교수로 임용되었다.

정치 경력

1814년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루아예 콜라르의 추천으로 내무성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관료 생활에 들어갔다. 1816년부터 1820년까지 법무성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이 시기 '독트리네르(Doctrinaires)'로 불리는 입헌군주제 지지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820년 베리 공작 암살 사건 이후 자유주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관직에서 물러났고, 1822년에는 소르본 대학의 강의도 금지당했다. 이 기간 동안 역사 연구에 전념하여 《유럽 문명사》(1828), 《프랑스 문명사》(1829~1832) 등의 주요 저작을 집필했다.

1830년 1월 리지외(Lisieux)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7월 혁명 당시 샤를 10세의 칙령에 반대하는 자유파 의원들의 항의서를 기초하는 데 참여했다. 루이 필리프 즉위 후 내무장관(1830년 8월~11월)을 지냈고, 이후 1832년부터 1837년까지 공교육 장관을 역임했다. 공교육 장관 재임 시 1833년 6월 28일 '기조 법(Loi Guizot)'을 제정하여 모든 코뮌(기초 자치단체)에 초등학교를, 각 데파르트망(주)에 초등사범학교를 설립하도록 의무화함으로써 프랑스 초등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1840년 2월부터 10월까지 주영국 대사를 지냈고, 같은 해 10월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1848년까지 재임했다. 1847년 9월부터는 국무회의 의장(총리)을 겸하며 실질적인 정부 수반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외적으로는 영국과의 '우호 협정(Entente cordiale)'을 중시하는 평화적 외교 노선을 취했다. 대내적으로는 재산 자격에 기반한 제한적 선거제(센시타르)를 고수하며 선거권 확대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부유해지라(Enrichissez-vous)'는 그의 발언(1843년 의회 연설 중 일부)을 비판적으로 인용하기도 했다.

몰락과 이후

1848년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붕괴되자 기조는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한 이후에는 정치 활동에서 물러나 역사 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주요 저서로는 앞서 언급한 문명사 외에도 《영국 혁명사》, 《회고록》(Mémoires pour servir à l'histoire de mon temps, 1858~1867) 등이 있다. 183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74년 9월 12일 칼바도스의 생투앵르팽에서 사망하였다.

역사적 평가

기조는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경계에서 활동한 인물로 평가된다. 초기에는 자유주의적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으나, 집권 이후에는 보수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여 선거권 확대와 민주화 요구에 맞섰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1848) 서문에서 기조를 구(舊) 유럽의 반혁명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언급하였다. 한편 교육사적 측면에서 1833년 기조 법은 프랑스 근대 공교육 제도의 출발점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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