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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궁

풍경궁(豐慶宮)은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년) 고종 황제의 명으로 평양에 건설된 행궁(行宮)이다. 한자로 '풍년 풍(豐)', '경사 경(慶)', '집 궁(宮)'을 쓴다.

개요

풍경궁은 평양을 제2의 수도인 서경(西京)으로 육성하려는 목적에서 건립이 추진되었다. 1902년 5월, 궁내부 특진관 김규홍(金奎弘)이 주(周)·한(漢)·당(唐)·명(明) 등 동아시아 제국이 두 개의 수도를 운영한 전례를 들어 평양에 행궁을 세울 것을 상소하였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조칙을 내렸다. 당시 고종은 등극 40주년과 망육순(望六旬,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을 맞아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는 등 세 가지 경사가 겹친 해였으며, 이러한 경축 분위기 속에서 풍경궁 건설이 추진되었다.

건축 구성

풍경궁은 총 360여 칸 규모의 대형 궁궐로 계획되었다. 주요 전각은 다음과 같다.

  • 태극전(太極殿): 정전(正殿)으로, 정면 9칸·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고종의 어진(御眞)이 봉안되었다.
  • 지덕전(至德殿): 편전(便殿)으로, 정면 9칸·측면 3칸 규모였다.
  • 중화전(重華殿): 동궁전(東宮殿)으로, 황태자(순종)의 예진(睿眞)이 봉안되었다. 정면 7칸·측면 3칸이었다.
  • 황건문(皇建門): 정문으로, 정면 3칸·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 문이었다.

건립 배경과 경과

풍경궁 건설의 배경에는 대한제국의 정통성 확립, 친러 정책과의 연계, 그리고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될 경우 황실의 피난처를 마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평양에는 러시아식으로 편제된 진위대(鎭衛隊)가 주둔하고 있었다.

공사는 1902년 6월 3일부터 시작되었으며, 평안남도관찰사 민영철(閔泳喆)이 총책임을 맡았다. 공사비는 황실의 내탕금(內帑金) 100만 냥 외에 평안남·북도 각지에서 조달한 향례전(鄕禮錢)과 원조전(援助錢) 등 총 1,005만여 냥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3년 11월 태극전과 중화전이 완공되었고, 고종과 황태자의 어진·예진이 봉안되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고, 고종은 실제로 풍경궁에 행차한 적이 없었다.

이후 변천

1907년 풍경궁은 일본에 의해 평양부동인의원(平壤府同仁醫院)으로 전용되었고, 1908년에는 풍경궁 관제가 폐지되어 봉안되었던 어진과 예진이 덕수궁 정관헌으로 이전되었다. 1913년에는 평양자혜의원(平壤慈惠醫院)으로 개칭되었고, 1933년에는 평양의학전문학교로 바뀌었다. 현재의 자리는 김일성종합대학 부속 평양의학대학이 위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풍경궁의 정문이었던 황건문은 1925년경 경성(서울) 대화정(大和町)에 있던 일본식 사찰 조계사(曹溪寺)로 이건되어 산문(山門)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동국대학교가 그 자리에 들어서면서 황건문은 동국대학교 정문으로 이용되었으나, 1971년 해체·철거되었다. 해체된 목재 일부는 충청남도 부여의 무량사(無量寺)로 팔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의

풍경궁은 대한제국 시기 마지막으로 건립된 궁궐이자 행궁으로, 고종의 황권 강화 의지와 당시의 국제 정세가 반영된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완공되지 못하고 사라져 '대한제국의 아방궁'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현재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며, 관련 기록과 사진 자료를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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