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로뱅(Paul Robin, 1837년 4월 3일 ~ 1912년 8월 31일)은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교육학자이다. 프랑스 툴롱에서 부르주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파리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수학하고 수학과 물리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다윈주의자이자 무신론자가 된 그는 1861년부터 1865년까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나 대중 교육 문제로 행정 당국과 갈등을 빚었다.
1865년 벨기에로 건너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ers' Association) 활동가들과 접촉하고 벨기에 지부 창설을 도왔으며, 파업 지지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이후 스위스, 프랑스(1870년 7월 투옥), 영국으로 은둔하였다. 런던에서는 인터내셔널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한동안 인터내셔널 총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와 결별하고 미하일 바쿠닌의 아나키스트 사상을 공유하게 되었다.
1879년, 교육부 장관 쥘 페리(Jules Ferry)의 초등교육 국장이었던 페르디낭 뷔송(Ferdinand Buisson)에 의해 초등교육 감독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1880년부터 1894년까지 상퓌(Cempuis, 우아즈)에 있는 프레보 고아원(Prévost Orphanage)의 원장을 맡아, 1869년부터 1870년 사이에 구상한 통합 교육(éducation intégrale)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였다. 이 교육은 불우 계층 아동에게 교육 접근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무신론과 국제주의 외에도 개인 전체의 조화로운 발전을 목표로 하였다. 관찰 중심의 수업, 아동의 예술적 방향 개발, 아동의 욕구 존중에 기반을 두었으며, 남녀공학을 원칙으로 삼았다. 신체·수공·지적 교육은 19가지 다양한 워크숍(제빵, 인쇄, 사진, 석공 등)으로 보완되어 아이들에게 최소한 한 가지 직업에 대한 완전한 교육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방식은 당시로서는 너무 혁명적이었고, 자유 언론의 격렬한 캠페인에 따라 1894년 8월 31일 상퓌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1896년 인간 재생 연맹(League for Human Regeneration)을 창설하여 프랑스에 신맬서스주의(Neo-Malthusianism) 원칙을 도입하고, 노동 계층 사이에서 피임 수단을 보급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는 '부모의 주의'(parental caution)를 빈곤층과 여성의 해방 수단으로 보았으며, 당시 의료계에 널리 퍼져 있던 우생학적 측면도 일부 발전시켰다.
기력과 능력이 쇠퇴함을 느낀 폴 로뱅은 1912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실증주의자였으며, 자신에게 독약이 미치는 영향의 진행 과정을 연구하였다. 그의 교육적 유산은 상퓌 이후에도 이어져 프란시스코 페레르(Francisco Ferrer)와 세바스티앙 포르(Sébastien Faure) 등 다른 아나키스트 교육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