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청(捕盜廳)은 조선 시대에 범죄자를 체포하고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한자 뜻은 '도둑을 잡는 관청'이며, 현대의 경찰서와 유사한 치안 기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약칭으로 포청(捕廳)이라고도 불렸다.
설치 배경과 창설
포도청의 정확한 창설 연대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주요 관찬 사서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경국대전》 반포 이후 또는 국조(國朝) 중엽이라는 대략적 시기만이 추론될 뿐이다. 초기에는 임시 기구로 출발하였다가 이후 상설 기구로 정착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독립된 치안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고, 형조·한성부·사헌부等의 3법사와 순청(巡廳) 등이 부수적으로 치안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도적의 증가로 효율적인 대응이 어려워지자, 문종 1년(1451년)부터 포도를 전담하는 관리와 기구를 두자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종 즉위년(1469년)에는 박중선(朴仲善)을 포도주장(捕盜主將)으로 삼아 전라도에 파견한 기록이 《성종실록》에 나타난다. 성종 12년(1481년)에는 포도사목(捕盜事目)을 제정하여 서울과 경기를 좌변과 우변으로 나누고 2인의 포도장이 책임을 맡게 하였다.
'포도청'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종 35년(1540년) 10월 7일의 기록이다. 이후 포도청은 상설 기관이 되어 형조·의금부·사헌부와 함께 조선 시대의 주요 사법 기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조직과 직제
포도청은 좌변포도청(좌포청)과 우변포도청(우포청)으로 나뉘었다. 좌변포도청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은동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한성부의 동부·남부·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다. 우변포도청은 한성부 서부 서린방 혜정교 남쪽(현재 종로구 종로1가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한성부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를 관할하였다.
《속대전》에 따르면 좌·우포청에는 각각 대장(종2품) 1인, 종사관(종6품) 3인, 부장 4인, 무료부장 26인, 가설부장 12인, 서원 4인 등이 배치되었다. 포도대장은 포도청을 지휘·감독하는 책임자였으며, 다른 군사 지휘관을 겸할 수 없었다. 종사관은 문무당하관으로 임명되어 포도대장을 보좌하고 죄인의 심문을 주관하는 실무를 담당하였다. 포도군관(捕盜軍官)은 정원 42명으로 현장 수사와 순라 업무를 수행하였다.
주요 업무
포도청의 주요 업무는 포도금란(捕盜禁亂), 즉 도둑을 수색·체포하고 법을 어기거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또한 순작(巡綽)이라고 불린 야간 순찰 업무도 수행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치안 공백을 메우기 위해 포도대장을 증원하고, 기민(飢民)들의 구호와 인가 훼철 단속 등 다양한 사회적 역할까지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 박해(병인박해 등)와 동학 탄압 과정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좌·우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 후 상급 기관으로 이송되기도 하였다.
폐지와 후신
고종 31년(1894년) 갑오경장으로 근대적 치안 기구인 경무청(警務廳)이 설치되면서 좌·우포도청은 폐합되었다. 포도청에서 이루어졌던 업무 기록들은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으며, 주로 조선 후기의 내용이 현존하여 19세기 조선 사회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