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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교

평양신학교는 한국 교회사에서 평양에 설립되었던 여러 신학 교육기관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동일한 이름으로 불린 기관들이 시대와 성격에 따라 다르게 존재해 왔으며,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01년 설립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와 1940년 설립된 평양신학교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1901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평양에 설립하였다. 초대 교장은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 새뮤얼 모페트(Samuel A. Moffett, 한국명 마포삼열)였다. 설립 당시에는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 네 개 선교단체가 협력하여 운영하였다.

초기에는 학생들이 대부분 교회의 장로나 조사로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1년에 3개월만 출석하는 제도를 채택하여 5년 과정으로 운영되었다. 1920년이 되어서야 3년 과정의 전문학교 제도가 도입되었고, 당시 등록 학생 수는 138명에 달해 세계 최대 규모의 신학교로 꼽히기도 하였다. 교육내용은 이론적 신학보다 성경 학습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교과 과정에는 교회사, 조직신학, 실천신학, 교양 과목 등이 포함되었다.

이 신학교는 1907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독노회 조직과 함께 전국 교회로 파송되었다. 교사 건물은 미국 시카고의 사이러스 맥코믹 여사의 기부금으로 건립되었으며, 1908년 착공하여 이듬해 준공되었다.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 신학교를 운영하던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거부하면서 신학교를 사실상 폐쇄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 참여를 공식 결정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평양신학교(1940년)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폐교된 뒤, 장로회 총회는 1939년 새 신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1940년 2월 9일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1940년 4월 채필근 목사를 교장으로 하여 설립되었으며 공식 명칭은 조선예수교장로회평양신학교였다. 이 기관은 신사참배를 수용한 친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부합하는 사역자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앞서 폐교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와 설립 주체, 목적, 계보 면에서 서로 무관한 별개의 교육기관으로 평가된다.

해방 후의 평양신학교(1945~1950년)

일제 강점기 종식 이후, 남북 분단 상황 속에서 북한 지역 교회들로 구성된 이북 5도연합노회는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육을 재개할 것을 결의하고 김인준 목사를 교장으로 하여 평양신학교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1947년 김인준 목사가 공산 정권에 연행되었고, 1950년 3월 이 학교는 공산 정권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후 북한 당국은 이 학교와 감리교 신학교인 성화신학교를 통폐합하여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산하의 기독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평양신학원(1972년)

북한의 종교 조직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운영하는 교직자 양성기관으로, 1972년 3월에 개원되었다. 1992년까지 7기 졸업생을 배출한 후 운영이 거의 중단되었다가 2000년 9월에 5년제 학제로 개편되어 운영되고 있다.

계승 관계에 관한 해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01년 설립된 평양신학교는 1938년 폐교된 이후 1940년 서울에서 김재준을 중심으로 개원한 조선신학원, 그리고 이후의 한신대학교 신학부 및 장로회신학대학교(현 장신대)의 계보로 이어지는 것으로 설명된다. 한편 위키백과는 어느 장로교 교파도 공식적으로 1912년 조직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를 직접 계승하는 곳이 없다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평양신학교의 정통 후신을 둘러싼 해석은 문헌에 따라 차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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