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피 2세(Pepi II)는 고대 이집트 제6왕조의 제5대 파라오로, 기원전 약 2300년대부터 기원전 2180년대까지 재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명(프레노멘)은 네페르카레(Neferkare)로, '레(Ra)의 카(영혼)는 아름답다'라는 뜻을 지닌다.
즉위 배경과 초기 통치
페피 2세는 기존 전통 학설에 따르면 페피 1세와 왕비 안크네스페피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알려져 왔으나, 사카라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하여 많은 이집트학자들은 페피 2세가 메렌레 1세와 안크네스페피 2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는 메렌레 1세 사후 불과 6세의 나이에 즉위하였으며, 초기에는 모후 안크네스페피 2세가 섭정을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브루클린 박물관에 소장된 설화석고 상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는 어린 페피 2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하르쿠프 서한
아스완 총독 하르쿠프(Harkhuf)의 무덤 비문에는 페피 2세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유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르쿠프는 누비아 원정 중 난쟁이(피그미)를 붙잡아 보고하였고, 이에 어린 파라오는 이 난쟁이를 무사히 데려오면 큰 상을 주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은 현존하는 최초의 여행 기록 중 하나로 평가된다.
재위 기간에 대한 논쟁
페피 2세의 재위 기간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논쟁이 있다. 고대 역사가 마네토는 94년, 투린 왕명록은 90년 이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동시대 사료에서 확인되는 가장 늦은 재위 연도는 제31차 가축 계수 이후의 연도(재위 62년 또는 63년에 해당)이다. 따라서 일부 이집트학자들은 그의 실질 재위 기간이 약 62~64년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94년 재위설은 후대의 기록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현재 학계에서도 확정된 결론은 없다.
가족 관계
페피 2세는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다. 네이트, 이푸트 2세, 안크네스페피 3세, 안크네스페피 4세, 우제브텐, 메리티테스 4세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중 우제브텐과 이푸트 2세는 페피 2세의 누이이거나 이복 누이로 추정된다. 아들로는 네멤티엠사프 2세(메렌레 2세)가 알려져 있다.
외교 정책
페피 2세는 전임 파라오들의 외교 정책을 계승하여 시나이 반도의 와디 마가레에서 구리와 터키옥을 채굴하고, 하트눕에서 설화석고를 채석하는 등 광물 자원 개발을 지속하였다. 남쪽으로는 누비아와의 교역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페니키아 도시 비블로스와의 교류 기록도 확인된다.
고왕국 쇠퇴와 사후 상황
페피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이집트 고왕국은 점진적으로 쇠퇴하였다. 지방 총독(노마르크)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그들의 직위가 세습화되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페피 2세는 후기에 재상(비지어) 직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분리하여 두 명의 재상을 두는 개혁을 단행했으나, 이는 오히려 권력의 분산을 가속화한 측면이 있다.
페피 2세 사후 아들 메렌레 2세가 약 1년여간 통치한 후 암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제6왕조는 급격히 붕괴하여 이집트 제1중간기(약 기원전 2181년 이후)가 시작되었다.
피라미드와 매장
페피 2세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위치하며, 복합 단지 명칭은 '네페르카레가 세워지고 살아 있다'이다. 피라미드는 변 길이 약 78.5미터, 높이 약 52.5미터 규모로, 전임 왕들의 표준적 형식을 따랐다. 무덤 내부에는 별이 그려진 천장과 화강암 석관이 있었으나, 관이 미완성 상태였고 비문도 제대로 새겨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페피 2세가 사망 후 급하게 매장되었고 피라미드 공사가 완료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이 피라미드는 19세기 말 존 페링과 가스통 마스페로에 의해 처음 조사되었으며, 이후 구스타브 제키에가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상세 발굴을 수행하였다.
역사적 평가
페피 2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파라오로 종종 언급되지만, 그의 통치기는 고왕국의 중앙 권력이 쇠퇴하고 지방 세력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그의 재위 기간과 통치의 실제 성과에 대해 여전히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