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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티낙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Publius Helvius Pertinax, 126년 8월 1일 ~ 193년 3월 28일)는 로마 제국의 제18대 황제이다. 재위 기간은 193년 1월 1일부터同年 3월 28일까지 약 3개월(86일)에 불과하며, 이 해는 이후 '다섯 황제의 해'로 불리는 내전 시기의 시작점이 되었다.

출생과 초기 생애

페르티낙스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알바 폼페이아(현재의 알바)에서 해방 노예(리베르투스) 출신인 헬비우스 수케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시대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입대 전까지 가정교사로 생활하다가 30대에 이르러 로마 군단에 자원 입대하였다. 부모의 옛 주인 가문의 후원과 본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군단 대대장 지위까지 올랐다.

군사 경력 및 정치적 승진

161년 파르티아 전쟁에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휘하의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 기간 동안 시리아,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의 라인강 및 도나우강 전선 등 로마 제국의 주요 국경 지역에서 장군이자 속주 총독으로 복무하였다. 169년 게르만 족의 침입을 격퇴한 공로로 인정받았으며, 175년에는 처음으로 집정관(콘술)에 올랐다. 이후 모이시아, 다키아, 시리아 일대를 관할하는 사령관으로 승진하였다.

콤모두스 황제 치세에도 일정한 신임을 유지하였으나, 권신 페렌니스의 견제를 받아 185년 브리타니아로 임지를 옮겼다. 브리타니아에서 군 기강을 엄격히 바로잡았으나, 이로 인해 반발을 사 187년 불명예스럽게 사직하기도 하였다. 이후 콤모두스의 동료 집정관을 지냈고, 188년부터 189년까지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즉위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되자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와 황실 관료 에클렉투스는 페르티낙스를 찾아가 황제 자리를 제안하였다. 페르티낙스는 근위대 병사 1인당 12,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그들의 지지를 확보한 뒤, 원로원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

통치와 개혁

즉위 후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 시대의 악폐를 청산하고 제국 재정을 안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의 권력 제한과 군사비 지출 억제를 시도하였고, 세금 감면 및 인구 감소 지역에 대한 면세 혜택을 부여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한 황실 내 해방 노예 출신 관료들의 횡령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이들을 처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자신을 즉위시킨 근위대와 궁정 관료들을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약속한 지급금을 이행하지 않고 근위대에 가혹한 훈련을 지시하는 등 갈등이 심화되었다.

암살

193년 3월 28일, 근위대장 라이투스가 주도한 300명의 군사들이 팔라티노 황궁으로 난입하였다. 페르티낙스는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위엄으로 병사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당한 끝에 암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사후

페르티낙스 사후 제위는 근위대 경매를 통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넘어갔다. 이후 같은 해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를 신격화(아포테오시스)하였으며, 자신의 공식 칭호에 '페르티낙스'를 포함시켜 정통성을 강화하였다.

평가

동시대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페르티낙스를 "국가 행정에서 인간성과 청렴함, 가장 경제적인 관리와 공공 복지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의 통치를 두고 계획 없이 지나치게 본인의 능력과 경험만을 앞세워 실패한 사례로 지적하였다. 현대 학계에서는 그를 고결한 인품과 올바른 의도를 가졌으나 정치적 현실 감각과 유연성이 부족하여 실패한 군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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