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라츠 충돌(Pakrac clash)은 크로아티아어로 '파크라츠 전투(Bitka za Pakrac)'라고도 불리며, 1991년 3월 1일부터 2일까지 크로아티아의 파크라츠(Pakrac) 마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이다.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내 민족 갈등이 격화되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후 전개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Croatian War of Independence)의 첫 번째 유혈 충돌로 평가된다.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집권하고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이 독립 정책을 추진하면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 간의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은 1990년 8월 무장 봉기를 시작하였고, 크닌(Knin)을 중심으로 한 달마티아 연안, 리카(Lika), 코르둔(Kordun), 바노비나(Banovina), 슬라보니아(Slavonia) 등지로 반란이 확산되었다. 1991년 초 크로아티아 인구조사 기준 파크라츠 지역의 인구 구성은 세르비아인이 46.4%, 크로아티아인이 35.8%였다. 1991년 2월 22일, 세르비아 민주당(SDS)의 벨코 잘쿨라(Veljko Džakula)가 통제하는 파크라츠 시의회는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자치주(SAO Krajina)로의 가입을 결의하였고, 2월 28일 크로아티아 헌법재판소는 이를 무효라고 판결하였다.
전개
1991년 3월 1일, 밀란 바비치(Milan Babić)와 밀란 마르티치(Milan Martić)의 지휘 아래 세르비아계 준군사 민병대가 파크라츠 경찰서와 시청을 장악하고 크로아티아인 정부 관리들을 억류하였다. 이에 투지만 대통령은 내무부 장관에게 마을 탈환을 명령하였다. 3월 2일 오전 4시 30분,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200명(루치코 대테러부대 및 오메가 특수경찰중대)이 파크라츠에 도착하여 경찰서 건물을 확보하였다. 이후 세르비아계 반군이 주변 언덕에서 경찰서를 향해 발포하였고,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은 반군 180명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가 개입에 나서면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전차 10대가 파크라츠에 도착하였다.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특수경찰로부터 마을 통제권을 빼앗을 계획(파크라츠-91 작전)을 세웠으나, 연방 대통령직 회의와 협상 끝에 크로아티아 정부가 특수경찰을 철수시키고 유고 인민군도 철수하는 데 합의하였다. 3월 12일까지 유고 인민군은 마을 북부 접근로로 철수하였고, 7일 후 완전히 철수하였다.
여파
이 협정으로 마을은 원래 상태로 복귀하였다. 체포된 경찰관 32명 중 17명은 3월 5일까지 복직하였고, 세르비아계 편을 들었던 파크라츠 경찰서장 요보 베즈마르(Jovo Bežmar)를 포함한 5명은 기소되었다. 세르비아 정부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언론은 이 충돌을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저지른 사건으로 왜곡 보도하였으며, 약 4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은 최종적으로 파크라츠에서 사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공식 발표해야 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사회당(SPS)은 이 충돌을 유고 인민군이 크로아티아를 강제 무장해제하는 명분으로 활용하였다. 이 사건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첫 전초전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