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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라 모더존베커

파울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 본명: 미나 헤르미네 파울라 베커)는 1876년 2월 8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1907년 11월 20일(또는 11월 30일) 보르프스베데에서 사망한 독일의 화가이다. 초기 표현주의의 주요 대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드레스덴 프리드리히슈타트에서 철도 엔지니어인 아버지 칼 볼데마르 베커와 귀족 가문 출신의 어머니 마틸데 사이에서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888년 가족이 브레멘으로 이주하였고, 런던 방문 중 세인트존스우드 예술학교에서 처음으로 회화 교습을 받았다. 1893년부터 1895년까지 교사 수업을 받는 한편 개인 회화 수업도 병행하였으며, 1896년 베를린 여성 예술가 조합이 후원하는 회화 및 드로잉 과정에 참여했다.

1898년 22세의 나이로 보르프스베데 예술 공동체에 합류하여 프리츠 마켄젠에게 사사하며 주변 농부들과 북독일 풍경을 주로 그렸다. 이 시기에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훗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아내) 및 릴케本人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1900년과 그 이후 여러 차례 파리를 방문하여 아카데미 콜라로시와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였으며,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등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야수파의 영향도 일부 작품에서 나타난다.

1901년 동료 화가 오토 모더존과 결혼하여 그의 전처 소생 딸 엘스베트의 의붓어머니가 되었다. 결혼 생활 중에도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여러 차례 파리로 떠나 남편과 떨어져 지내기도 했다. 1906년 마지막 파리 체류 기간 동안 여성 화가로서는 전례가 없던 누드 자화상을 제작하였으며, 이는 서양 미술사에서 여성 화가가 자신의 누드를 그린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같은 시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베르너 좀바르트의 초상화도 그렸다.

1907년 초 남편에게 돌아와 임신하였고,同年 11월 2일 딸 마틸데(틸리) 모더존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출산 후 심한 다리 통증을 호소하였고, 의사의 권고로 기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의 혈전(심부정맥 혈전증)이 색전증으로 발전하여 11월 20일(또는 30일) 사망하였다. 향년 31세였다.

화가로서의 짧은 경력 동안 템페라와 유화로 작업하였으며, 징크 화이트, 카드뮴 옐로, 비리디언, 울트라마린 등 절제된 색상을 사용했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기법으로 훈련받았으나 점차 형태를 단순화하고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생전에는 약 3점의 그림만 판매될 정도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약 400점의 회화와 700점 이상의 드로잉, 13점의 에칭을 남겼다. 사후 1920년대에 수집·출판된 편지와 일기를 통해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독일 표현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1908년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녀를 기리는 시 「친구를 위한 장송곡(Requiem für einen Freund)」을 썼다. 1927년 브레멘에 파울라 모더존베커 미술관(Paula Modersohn-Becker Museum)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여성 화가 단독을 위한 최초의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1978년 딸 마틸데 모더존이 파울라 모더존베커 재단을 설립하였다. 2016년에는 그녀의 삶을 다룬 독일 전기 영화 <파울라(Paula)>가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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