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1607년 3월 12일 ~ 1676년 5월 27일)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 찬송가 작가이다. 그는 독일 루터교회에서 마르틴 루터 다음으로 가장 뛰어난 찬송가 작가로 평가되며, 그의 찬송가들은 현대 독일 개신교 찬송가집에 여전히 수록되어 사용되고 있다.
게르하르트는 작센 선제후국의 그레펜하이니헨(Gräfenhainichen)에서 중산층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19년, 어머니는 1621년에 사망하였다. 15세에 그리마(Grimma)의 후르스텐슐레(Fürstenschule)에 입학하여 1627년에 졸업하였고, 1628년 1월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등록하였다. 그곳에서 파울 뢰버(Paul Röber)와 야코프 마르티니(Jacob Martini)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은 모두 강한 루터파 신학자였다. 게르하르트는 이들을 통해 찬송가를 목회적 돌봄과 교육의 도구로 활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비텐베르크 대학교를 약 1642년경 졸업한 후, 30년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즉시 목사로 임명되지 못하고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변호사 안드레아스 바르톨트(Andreas Barthold) 가정의 가정교사로 일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찬송가와 시가 베를린 니콜라이 교회의 칸토르인 요한 크뤼거(Johann Crüger)의 주목을 받았고, 크뤼거는 그의 찬송가 다수를 자신의 찬송가집인 《프락시스 피에타티스 멜리카》(Praxis pietatis melica)에 수록하였다.
1651년 9월, 게르하르트는 베를린 근교의 미텐발데(Mittenwalde)에서 첫 교회직을 맡았다. 그곳에서 대부분의 찬송가를 작곡하였으며, 안나 마리아 바르톨트와 결혼하였다. 1657년 베를린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로 소집되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루터파와 개혁파 성직자 간의 갈등을 중재하려 한 일련의 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게르하르트는 루터파 성직자들의 주요 목소리로서 루터 신앙을 수호하는 여러 문서를 작성하였다. 1664년 선제후의 종교적 칙령으로 인해 루터파 신학 고백서인 콩코르디아 서식(Formula of Concord)이 금지되자, 게르하르트는 이를 따를 수 없어 1666년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베를린 시민들의 청원으로 그를 위한 예외가 마련되었으나, 그의 양심상 그러한 직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약 1년 이상 무직 상태로 지냈다. 이 기간에 아내가 사망하였다.
1668년 10월, 작센-메르제부르크 공국의 뤼벤(Lübben)에서 부제(archdeacon)로 임명되었고, 8년간의 목회 끝에 1676년 5월 27일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게르하르트의 찬송가 중에는 《오 주여, 상처 입은 머리여》(O Haupt voll Blut und Wunden), 《어린 양이 가며 죄를 지니시니》(Ein Lämmlein geht und trägt die Schuld), 《어떻게 너를 영접하리오》(Wie soll ich dich empfangen), 《나의 마음아, 즐거이 깨어나라》 등이 있다. 그의 찬송가 가사 중 다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수난곡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및 칸타타에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게르하르트의 찬송가 가사를 여러 곳에서 활용하였다.
게르하르트의 찬송가 중 123편이 확인되었으며, 이 중 약 40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독일 개신교 현행 찬송가집 《에반겔리셰스 게장부흐》(Evangelisches Gesangbuch)와 가톨릭 찬송가집 《고테슬로프》(Gotteslob)에도 그의 찬송가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일부 미국 루터교회에서는 매년 10월 26일을 그의 기념일로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