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1세(러시아어: Павел I, 1754년 10월 1일 ~ 1801년 3월 23일)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재위 기간은 1796년 11월 17일부터 1801년 3월 23일까지이다. 본명은 파벨 페트로비치 로마노프(Павел Петрович Романов)이며, 로마노프 왕조의 9번째 군주에 해당한다.
출생과 가계
파벨 1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궁전에서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만 그의 생부에 대해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측근이었던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며 공식적으로는 표트르 3세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파벨은 태어난 직후부터 할머니인 옐리자베타 여제의 손에서 양육되었으며,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와는 거의 교류가 없이 성장하였다. 아버지 표트르 3세는 1762년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폐위된 후 사망하였고, 예카테리나 2세가 직접 황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파벨은 오랜 기간 황태자(체사레비치)의 지위에 머물면서도 어머니의 감시 아래에서 생활해야 했다.
즉위와 통치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한 후 파벨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는 손자인 알렉산드르(훗날의 알렉산드르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파벨 1세는 즉위 후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정책 전반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통치를 시작하였다. 그는 어머니가 총애하던 신하와 측근들을 배척하고, 어머니와 연관된 정책들을 폐기하거나 변경하였다. 1797년에는 제위 계승법을 발표하여 장남 상속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그의 통치 방식은 엄격하고 혹독한 규제로 일관되었다. 프랑스 혁명 사상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오는 사상 서적을 금지하고 프랑스풍의 의복 착용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농노의 노동 부역 일수를 주 3일로 줄이는 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황실 영지 농민 약 12만 명을 지주 귀족에게 양도하여 결과적으로 농노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파벨 1세는 귀족들에게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일방적인 충성을 강요하였고, 귀족들의 여러 특권을 박탈하면서 귀족 사회의 광범위한 불만을 초래하였다.
대외 정책
1798년 파벨 1세는 프랑스에 맞서는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 군대는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와 함께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파벨 1세는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등 대외 정책에서도 급격한 노선 변경을 보였다.
암살
1801년 3월 23일 새벽, 파벨 1세는 미하일롭스키 성의 침실에서 암살되었다. 베니히센 백작의 개인 소유 군인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침실에 들어와 퇴위를 강요하였고, 이에 격분한 파벨 1세가 반발하자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일설에는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가 이 암살에 동의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확실하게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가족
파벨 1세는 첫 번째 아내인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러시아 이름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와 사별한 후, 1776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재혼하였다. 마리아 표도로브나와의 사이에서 4남 6녀를 두었으며, 그중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가 각각 러시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평가
파벨 1세의 통치 기간은 약 5년에 불과하며, 그의 통치 방식은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에 대한 피해의식과 적대감이 통치 전반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제위 계승법의 확립은 이후 러시아 왕조의 계승 질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업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