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미프(러시아어: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ф, 1901년 8월 3일 ~ 1939년 9월 10일)는 소련의 중국학자, 코민테른 요원, 교육자이다. 본명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포르투스(러시아어: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ортус)이다.
생애
1901년 러시아 제국 헤르손현 벨리카야알렉산드롭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사무일로비치 포르투스는 은행원으로 일했다. 1917년 5월 볼셰비키에 입당하였고, 러시아 내전 기간인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스베르들로프 공산주의자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수학했으며,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에서 활동했다.
1925년 카를 라데크가 총장으로 있던 모스크바 중산 대학(모스크바 순야트센 대학)의 부총장에 임명되었고, 1927년 라데크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었다. 총장 재임 기간 동안 모스크바 중산 대학에 중국 연구소를 설립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 및 중화민국 주재 코민테른 대표로 활동하며 중국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1927년)와 제6차 전국대표대회(1928년)에 참가했고, 1931년 중국공산당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코민테른 중앙위원회 서기장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중국 정책 자문을 맡았으며,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과 중국 공산혁명 노선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1936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총장이 되었고, 1937년 해당 대학 산하 식민지문제연구소 소장을 겸임했다.
숙청과 사망
1937년 12월 11일, 대숙청(대테러) 시기에 내무인민위원부(NKVD)에 체포되었다. 1938년 7월 28일 소련 최고법원에서 반혁명 분자로 분류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1939년 9월 10일 처형되었다. 사후 1956년 2월, 니키타 흐루쇼프의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 이후 진행된 스탈린 격하 운동 시기에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 및 영향
미프는 코민테른 요원으로서 중국 공산당 내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린 국제파 그룹을 지원했다. 이 그룹은 모스크바 중산 대학에서 수학한 중국인 유학생들로 구성되었으며, 왕밍(王明)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미프는 1930년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어 이 그룹을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포진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개인사
누나 마리야 포르투스는 번역가 및 소련군 정보 요원으로 활동했다. 아들 니아가르 파블로비치 미프(1929년~2001년)는 전러시아 측정학연구소 소속 측정학자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