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 전투는 1951년 5월 26일부터 5월 28일까지 강원도 화천군 화천저수지(현 파로호) 일대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6보병사단과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지원군(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6·25 전쟁(한국전쟁) 중 중공군의 춘계 공세 과정에서 발생한 전투로, 용문산 전투와 연계되어 "용문산-파로호 전투"로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배경
1951년 4월과 5월, 중공군과 북한군 연합군은 유엔군을 격퇴하기 위해 두 차례의 춘계 공세를 전개하였다. 4월 공세 이후 유엔군은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5월 공세에서는 중공군이 국군 제3군단을 포위 공격하는 등 공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중공군은 작전 한계점에 도달하면서 후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유엔군은 5월 20일부터 제3차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캔사스선 탈환을 목표로 하였으며,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화천 탈환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전투 경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따라 미 제9군단 예하의 미 제24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6사단, 미 제7사단이 화천을 향해 진격하였다. 미 제9군단장은 후퇴하는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 제24사단 제21연대, 미 제7사단 제17연대,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를 투입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장도영 준장의 지휘 아래 양평에서 출발해 가평, 춘천을 거쳐 화천발전소까지 약 60km를 진격하며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였다. 5월 25일,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의 방어 거점인 계관산과 북배산 일대를 공격하고, 제19연대를 우회시켜 적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5월 27일에는 미군의 포격과 공습 지원 아래 공격을 개시하여 중공군 제63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구만리 발전소와 병풍산을 연결하는 캔사스선까지 진출하였다.
5월 28일 미군 주력이 화천읍을 점령하고 국군이 화천저수지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퇴로가 차단된 중공군은 저수지에서 익사하거나 대부분 포로로 잡혔다.
결과 및 명칭 유래
이 전투에서 국군은 중공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중공군 사망자는 약 2만 명 이상, 포로는 약 2,600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중공군 최소 2만 5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국군 측의 피해는 사망 약 698명으로 기록되었다.
화천저수지는 이 전투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로 명명하였고, 1955년 11월에는 명명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전사자의 시체가 화천호에 수장된 데서 유래한 명칭이라는 설명도 존재한다.
전투 명칭에 관한 참고 사항
이 전투는 문헌에 따라 '파로호 전투', '지암리·파로호 전투', '용문산-파로호 전투'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위키백과 등에서는 '파로호 전투'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한·미 양측과 중국 측의 전투 결과 및 피해 규모에 대한 주장에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측의 기록에서는 이 전투에 대한 피해 규모를 다르게 보고하는 경우가 있어, 구체적인 사상자 수치는 각 측의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의의
파로호 전투는 6·25 전쟁 중 국군이 주도적으로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로 평가된다. 군사 전문가들은 이 전투를 용문산 전투와 함께 국군의 작전 수행 능력과 전투 의지를 국제사회에 입증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