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라틴어: Titus Manlius Torquatus)는 고대 로마 공화정 시기의 귀족 가문인 만리우스 씨족(gens Manlia)의 일원으로, 동명의 인물이 여러 세대에 걸쳐 존재한다. '토르콰투스(Torquatus)'라는 칭호는 기원전 361년경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가 갈리아인 족장과의 일기토에서 승리한 후 적의 목걸이(토르퀘스, torques)를 전리품으로 획득한 데서 유래한 코그노멘으로, 이후 이 가문의 상징이 되었다.
주요 인물
1.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Titus Manlius Imperiosus Torquatus)
로마 공화정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기원전 347년, 344년, 340년에 세 차례 집정관(consul)을 지냈고, 기원전 353년, 349년, 320년에 세 차례 독재관(dictator)을 역임했다. 기원전 361년 아니오 강 전투에서 거대한 갈리아 전사와의 일기토에서 승리하여 그의 목걸이를 빼앗아 자신의 목에 걸었고, 이로 인해 '토르콰투스'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엄격한 군기로 유명했는데, 기원전 340년 라틴 전쟁 당시 집정관으로서 전군에 "명령 없이 적과 싸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적 기병대장의 도발에 넘어가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투를 벌여 승리하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아들을 공개 처형했다. 이 일화는 이후 '만리우스식 규율(imperia Manliana)'이라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졌다. 같은 전쟁에서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전사한 후, 그는 라틴 동맹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2.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기원전 299년 집정관)
위 인물의 손자이자 증손자로, 기원전 29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에트루리아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기병대를 이끌고 이동하던 중 적의 공격을 받고 낙마하여 전사했다.
3.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기원전 235년, 224년 집정관, 생몰: ? ~ 기원전 202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기원전 235년 첫 집정관에 선출되어 사르데냐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개선식을 거행했으며,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아 로마의 평화를 상징했다. 기원전 231년 감찰관(censor)을 지냈으나 선거 하자로 사임했다. 기원전 224년 두 번째 집정관으로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보이족(Boii)을 상대로 포 강을 처음으로 도하한 로마군을 지휘했다.
칸나이 전투(기원전 216년) 이후 원로원에서 한니발에게 포로로 잡힌 로마 병사들의 몸값 지불을 강력히 반대했으며, 라틴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확대하는 제안에도 반대했다. 기원전 215년 법무관(praetor)으로 사르데냐에 파견되어 카르타고군과 반란군을 격파하고 섬을 로마에 확보했다. 기원전 212년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 사제장) 선거에서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경쟁했으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에게 패했다. 기원전 210년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 원로원 의장) 자리를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에게 양보했다. 기원전 208년 독재관에 임명되어 선거와 경기 개최를 주관했다. 기원전 202년 사망했다.
4.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기원전 165년 집정관)
위 인물의 손자로, 기원전 16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당대에 명성이 높은 법학자였으며, 아들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만리아누스가 마케도니아 총독 재임 중 공금 횡령 혐의로 고발당하자 원로원에 가족 재판을 청구하여 직접 심의한 후 아들을 추방하였고, 이에 아들은 자살했다. 이는 조상의 엄격한 규율을 계승한 사례로 전해진다.
가문의 계보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가문은 로마 공화정 전반에 걸쳐 여러 명의 집정관, 감찰관, 독재관을 배출한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주화에 토르퀘스(목걸이) 문양을 새겨 넣음으로써 자신들의 코그노멘의 유래를 자랑스럽게 표시했다. 가문의 구성원들은 엄격한 군율과 가혹할 정도의 규율 준수로 유명했으며, 이는 '만리우스식 명령(imperia Manliana)'이라는 관용어를 낳았다.
문화적 영향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의 이야기는 이후 여러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처형 장면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들(장시몽 베르틀레미, 알퐁스 고다르 드 라베르딘 등)에 의해 자주 그려졌으며,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 페르디난트 볼도 이 장면을 묘사했다. 또한 안토니오 비발디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페라 《티토 만리오》(Tito Manlio, RV 738)를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