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년 12월 4일 ~ 1881년 2월 5일)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평론가, 역사가, 철학자이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되며, '첼시의 현자(Sage of Chelsea)'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
칼라일은 스코틀랜드 덤프리스셔의 에클페칸에서 석공이자 소작농이었던 아버지 제임스 칼라일과 어머니 마거릿 에이트컨 칼라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엄격한 칼뱅주의 청교도 신자였으며, 이러한 종교적 배경은 칼라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수학과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목사가 되라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문필가의 길을 선택했다. 1826년 제인 웰시와 결혼하였다.
주요 저작과 사상
칼라일의 첫 주요 저작은 반자전적 철학 소설인 《의상철학》(Sartor Resartus, 1833~1834)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대자연을 신의 의복으로, 모든 상징·형식·제도를 가공의 존재로 보는 독특한 철학을 전개하며 경험론과 공리주의에 도전했다.
1837년 발표한 《프랑스 혁명사》(The French Revolution: A History)는 그의 대표적 역사 저술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며 명성을 얻었다. 이 책에서 칼라일은 프랑스 혁명을 군주와 귀족의 악정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해석하였다. 이 저작의 집필 과정에서 존 스튜어트 밀에게 빌려준 초고가 하녀에 의해 소실되는 사건을 겪고 다시 집필한 일화가 유명하다.
1841년 발표된 《영웅 숭배론》(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은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작으로, 역사가 소수의 뛰어난 개인(영웅)에 의해 형성된다는 '위대한 인간 이론(Great Man theory)'을 제시하였다. 그는 신, 예언자, 시인, 성직자, 문필가, 군주 등 여섯 유형의 영웅을 분류하고, 셰익스피어, 루터, 크롬웰, 나폴레옹 등을 인류의 영웅으로 꼽았다.
《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 1843)에서는 중세 수도원의 공동체 정신을 이상화하며 산업혁명 시대의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는 인간관계가 오직 금전으로만 환원되는 현상을 '현금 연결(Cash nexus)'이라는 개념으로 비판했으며, 이 표현은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었다.
그 외 주요 저작으로는 《올리버 크롬웰의 편지와 연설》(1845), 《현대 논설》(Latter-Day Pamphlets, 1850),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불리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1858~1865) 등이 있다.
사회·정치적 입장
칼라일은 자유방임주의 자본주의와 공리주의를 '음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라고 비판하며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유기적 사회 질서와 엘리트 지도자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산업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의 대장(Captains of Industry)'이 이끄는 '노동의 기사도(Chivalry of Labour)'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논란의 여지도 컸다. 1849년 발표한 《흑인 문제에 관한 수상록》(Occasional Discourse on the Negro Question)에서는 노예제를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여 존 스튜어트 밀 등 당대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반유대주의적 발언과 인종주의적 관점으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영향과 평가
칼라일은 19세기 영국 문학과 사상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찰스 디킨스, 존 러스킨, 랠프 월도 에머슨, 조지 엘리엇 등 당대 주요 작가와 사상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런던 도서관(London Library)을 설립하였고,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설립에도 기여했다. 1865년에는 에든버러 대학교 명예 총장(Lord Rector)으로 선출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그의 영웅 숭배론과 반민주주의적 사상이 파시즘과 나치즘의 이론적 선구자로 해석되면서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칼라일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요제프 괴벨스가 칼라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탐독한 사실이 알려져 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칼라일의 사상과 20세기 전체주의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칼라일은 1881년 2월 5일 런던에서 사망하였으며, 유언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장 제의를 거절하고 고향 에클페칸의 교회 묘지에 부모와 함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