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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 헤이에르달

토르 헤이에르달(Thor Heyerdahl, 1914년 10월 6일 ~ 2002년 4월 18일)은 노르웨이 출신의 탐험가이자 인류학자, 실험 고고학자이다. 오슬로 대학교에서 동물학, 식물학, 지리학을 전공하였으며, 이후 민족지학(ethnography)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생애

노르웨이 라르비크(Larvik)에서 맥주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로부터 진화론에 대한 관심을 물려받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동물학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오슬로 대학교에서 동물학과 지리학을 전공하였고, 재학 중 폴리네시아 문화와 역사를 독학으로 연구하였다. 1936년에 결혼하였으며, 1937년 신혼여행 겸 학술 조사를 위해 부인과 함께 남태평양 마르키즈 제도의 파투 히바(Fatu Hiva) 섬으로 떠났다. 이곳에서 원시 생활을 경험하며 고대 문명 간 대양 횡단 접촉 가능성에 대한 가설을 처음으로 발전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노르웨이 망명 정부군 소속으로 핀마르크 지역에서 복무하였다. 전후 세 차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콘티키(Kon-Tiki) 원정 (1947년)

헤이에르달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1947년의 콘티키 원정이다. 그는 남아메리카 페루에서 폴리네시아 제도로 고대인들이 대양을 건너 이주할 수 있었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발사(balsa) 나무로 만든 원시적인 뗏목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였다. 페루 칼라오 항구를 출발한 지 101일 만에 약 8,000km를 항해하여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투아모투 제도에 도착하였다. 뗏목은 태양신을 의미하는 '콘티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원정은 1951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었고, 헤이에르달이 쓴 책은 7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폴리네시아인의 기원이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는 그의 이론(초확산주의, hyperdiffusionism)을 대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어학, 고고학, 유전학적 증거는 폴리네시아인이 동남아시아(오스트로네시아 팽창)에서 기원했음을 뒷받침한다.

이스터 섬 원정 (1955~1956년)

1955~1956년에는 노르웨이 고고학 원정대를 조직하여 이스터 섬(라파누이)을 탐사하였다. 모아이 석상의 조각, 운반, 세우기 실험을 진행하였고, 오롱고(Orongo), 포이케(Poike) 등의 주요 유적지를 발굴하였다. 이 원정의 결과는 여러 권의 학술 보고서로 출판되었다.

라(Ra) 원정 (1969~1970년)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배를 재현한 '라 호'와 '라 2세 호'를 건조하여 모로코에서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대서양을 횡단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1969년 첫 번째 시도인 '라 호'는 선미 구조의 문제로 침몰하였으나, 1970년 '라 2세 호'는 바베이도스에 성공적으로 도착하여 고대 문명 간 대서양 횡단 가능성을 입증하였다. 각기 다른 인종, 국적, 종교, 정치적 신념을 가진 선원들을 선발하여 공동체 협력의 모범을 보여주고자 하였으며, 해양 오염 샘플을 채취하여 유엔에 보고하였다.

티그리스(Tigris) 원정 (1977~1978년)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 간의 교역 및 이주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라크에서 갈대배 '티그리스 호'를 건조하여 페르시아만을 거쳐 파키스탄, 홍해까지 항해하였다. 5개월간의 항해 후, 헤이에르달은 주변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항의하는 의미로 지부티에서 배를 불태웠다. 이는 평화와 환경 보호에 대한 그의 목소리를 세계에 알리는 상징적 행위였다.

후기 활동과 학설

헤이에르달은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의 아조프 지역에서 '오딘 찾기'(Jakten på Odin)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북유럽 신화의 오딘이 흑해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이는 노르웨이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언어학자들로부터 방법론의 부재와 자료의 선택적 사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91년에는 스페인 테네리페 섬의 기마르 피라미드(Pyramids of Güímar)가 태양 숭배와 관련된 고대 구조물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후 고고학적 발굴 결과 19세기 이후의 건축물로 확인되었다.

말라디브 제도에서는 불교 시기의 하비타(Havitta) 고분을 조사하고 그 아래에서 더 오래된 구조물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사망과 유산

헤이에르달은 2002년 4월 18일, 이탈리아 콜라 미케리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 노르웨이 정부는 그에게 국장을 허락하였으며, 유해는 오슬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장례식 후 안장되었다. 2024년에는 유골이 고향 라르비크 교회 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이론은 학계에서 폭넓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실험 고고학의 선구자로서 고대 항해 기술의 가능성을 대중에게 제시하는 데 기여하였다. 콘티키 박물관(오슬로)이 그의 유산을 보존·전시하고 있으며, 2000년 설립된 토르 헤이에르달 연구소가 그의 사상을 계승·발전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11년에는 그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되었다.

노르웨이 해군의 난센급 호위함 중 한 척이 '토르 헤이에르달'로 명명되었고, 소행성 2473 헤이에르달(2473 Heyerdahl)과 명왕성의 계곡인 헤이에르달 계곡(Heyerdahl Vallis) 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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