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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 조약

톈진 조약(天津條約, Treaty of Tianjin/Tientsin)은 19세기 중국 톈진(天津)에서 청나라와 여러 열강 사이에 체결된 일련의 조약들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동일한 지명에서 체결된 별개의 조약들이 존재하므로, 맥락에 따라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1858년 톈진 조약

1858년 6월,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과 각각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들은 1860년 청 황제의 비준을 거쳐 발효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쟁 배상금 지급
  • 외교관의 베이징 주재 허용
  • 외국인의 중국 내 여행 및 무역 자유 보장
  • 기독교 포교의 자유 및 선교사 보호
  • 뉴장(牛莊), 덩저우(登州), 한커우(漢口), 주장(九江), 전장(鎭江), 타이난(臺南), 단수이(淡水), 차오저우(潮州), 충저우(瓊州), 장닝(江寧) 등 10개 항구의 추가 개방

이 조약은 청나라가 서구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불평등한 국제 질서에 편입되는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이후 불평등 조약 체제의 근간이 되었다. 청나라는 조약 내용에 불만을 품고 비준을 거부하였으나,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공격과 러시아의 중재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해당 내용이 재확인되었다.


2. 1871년 청일수호조규

1871년 9월 13일, 청나라와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정식 명칭은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이다. 청 측에서는 이홍장(李鴻章), 일본 측에서는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가 전권대사로 참여하였다. 청나라가 서양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과 달리, 이 조약은 상호 대등한 원칙에 따라 체결된 것이 특징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상호 불침략, 양국 수도에 외교관 주재, 개항장에 영사 설치 및 영사재판권 규정 등이 포함되었다.


3. 1885년 청일 톈진 조약

1885년 4월 18일, 청나라와 일본이 갑신정변(1884)의 사후 처리를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청 측의 이홍장과 일본 측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교섭을 주도하였다. 총 3개 조항으로 구성되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양국 군대의 철수: 청과 일본은 조약 체결 후 4개월 이내에 조선에 주둔 중인 모든 군대를 철수한다. 청군은 마산포(馬山浦), 일본군은 인천항을 통해 철수한다.
  2. 군사 교련의 위임: 조선 국왕이 자위와 치안 유지를 위해 외국인 무관을 고용하여 군대를 훈련시키도록 권고하며, 청과 일본은 자국 무관을 조선에 파견하지 않는다.
  3. 파병 시 상호 통보: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여 양국 중 한쪽이라도 파병이 필요할 경우, 사전에 상대국에 문서로 통지하고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수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이 조약으로 청과 일본 양국 군대는 조선에서 철수하였으나, 제3조의 상호 통보 조항은 오히려 일본이 조선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청군이 조선에 파병되자, 일본은 이 조항을 명분으로 자국 군대를 파병하였고, 이는 청일전쟁 발발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4. 1885년 청불 톈진 조약

1885년 6월, 청불전쟁(청프전쟁) 종결 후 청나라와 프랑스 제3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사실상 상실하였고,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지배가 국제적으로 공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조약문에는 청과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종번 관계를 명시적으로 단절한다는 표현 대신, 프랑스가 청조의 '위망체면(威望體面)'을 존중한다는 애매한 문구가 사용되었다.


참고: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톈진 조약"은 주로 1885년 청일 간 조약을 가리키며, 갑신정변의 결과 및 청일전쟁의 배경으로 다루어진다. 동아시아사에서는 1858년 조약과 1885년 청일 조약이 함께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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