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현(太賢)은 8세기 중엽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 활동한 승려로, 일명 대현(大賢)이라고도 한다. 호는 청구사문(靑丘沙門)이다. 주로 경주 남산의 용장사(茸長寺)에 주석하며 유식학(唯識學) 연구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7세기 중반 이래 신라 유식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종합한 인물로서, 특히 유식학에 뛰어난 대가로 알려져 중국의 학자들도 그의 저술을 주목하였다고 전한다. 원효(元曉), 의적(義寂), 경흥(憬興)과 더불어 신라 4대 저술가로 꼽힐 정도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고려 전기에 이르러 유가업(瑜伽業)의 종조(宗祖)로 추숭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753년(경덕왕 12년) 여름에 가뭄이 심해지자 경덕왕이 태현을 궁궐로 불러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론하게 하였는데, 이때 우물의 물이 넘치는 이적이 나타나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明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태현이 절에 있던 미륵석조장육상의 둘레를 돌면 불상도 그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현의 저술은 총 52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 《기신론내의약탐기(起信論內義略探記)》,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 《범망경보살계본종요(梵網經菩薩戒本宗要)》, 《약사본원경고적기(藥師本願經古迹記)》 등이 있다. 저술 목록을 통해 그가 아미타 신앙과 미륵 신앙에도 큰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범망경보살계본종요》는 일본의 율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술은 경(經)에 관한 것 20종, 율(律)에 관한 것 3종, 논(論)에 관한 것 29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장(玄奘) 이후의 신유식학뿐만 아니라 《대승기신론》도 수용한 융합적인 사상 경향을 보였다. 《삼국유사》에는 태현이 화엄승 법해(法海)와의 법력 대결에서 진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이는 《삼국유사》의 화엄 우위 서술 경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