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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닌 끄라이위치안

타닌 끄라이위치안(Thanin Kraivichien, 태국어: ธานินทร์ กรัยวิเชียร, 1927년 4월 5일~2025년 2월 24일)은 태국의 판사, 법학 교수, 정치인이다. 그는 1976년부터 1977년까지 태국의 제14대 총리를 역임했다.

생애와 교육

타닌은 시암(태국의 옛 국호) 방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태생의 상인으로 방콕에서 가장 큰 전당포 중 하나를 운영했다. 타닌은 탐마삿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1948년에 졸업했으며, 이후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법학을 계속 공부하여 1953년에 졸업했다. 1958년에는 그레이 법조원(Gray's Inn)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영국 체류 시절 덴마크 출신의 카렌 안데르센(Karen Andersen, 1928~1995)을 만나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 5명의 자녀가 있었다.

법조인 경력

1954년 태국으로 돌아온 타닌은 법무부에서 근무하며 배석 판사가 되었다. 이후 빠르게 승진하여 태국 대법원장에까지 올랐다. 또한 탐마삿 대학교와 쭐랄롱꼰 대학교, 태국 변호사 협회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그는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1973년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한 민주항쟁 이후, 타닌은 국왕에 의해 임명된 과도기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극우 반공주의 운동인 '나와폰(Nawaphon)'의 일원이 되었으며, 공산주의, 학생 운동, 진보 정치인들을 공격하는 내용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총리 재임(1976~1977)

1976년 10월 6일 탐마삿 대학교 학살 사건 이후, 민주적으로 선출된 세니 쁘라못 정부는 산가드 찰로류 해군 제독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쿠데타 이틀 후, 군부는 타닌을 총리로 임명했다. 이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으며, 타닌의 강경 우파적 성향이 군부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닌 정부는 "국민이 아직 완전한 자유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명분 아래 12년 단계의 '유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 체제를 추진했다. 그의 정부는 국민 안보를 명목으로 총리에게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한 헌법을 제정하여 사실상의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재임 기간 동안 언론 검열을 강화하고, 조지 오웰과 토머스 모어 등이 쓴 저서를 포함해 약 4만 5천 권의 도서를 압수·소각했으며, 노동조합과 파업을 금지하고 진보 성향 학생 단체와 농민 단체를 탄압했다.

타닌의 강경 정책은 반대로 많은 활동가들을 태국 공산당의 지하 조직으로 밀어 넣었고, 정부에 대한 무장 투쟁을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1977년 3월 젊은 장교들('영 터크스'로 불림)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으나, 1977년 10월 20일 산가드 제독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타닌의 사임을 강요했다. 군부는 타닌 정부가 국가를 분열시키고 대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으며, 장기간의 민주주의 중단에 대한 국민의 반대가 컸다는 점을 개입의 근거로 제시했다.

추밀원 활동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타닌을 즉시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했다. 2016년 10월 13일 푸미폰 국왕이 사망한 후 왕좌가 공석인 동안, 전 추밀원 의장 쁘렘 띤나술라논이 섭정을 지냈고, 타닌은 이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추밀원 의장직을 맡았다. 2016년 12월 1일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이 즉위한 이후 쁘렘이 이전 직위로 복귀했으며, 타닌은 추밀원에 재임명되지 않았다.

사망

타닌 끄라이위치안은 2025년 2월 23일(한국 위키백과 기준 2월 24일) 향년 97세로 사망했다. 그는 쁘렘 띤나술라논이 2019년 5월 사망한 이후 가장 나이가 많은 생존 전직 태국 총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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