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Cleopatra Selene II, 그리스어: Κλεοπάτρα Σελήνη, 기원전 40년 ~ 기원전 5년)는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이자, 키레나이카의 여왕(기원전 34년~기원전 30년),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여왕(기원전 25년~기원전 5년)이다.
출생과 가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기원전 40년 여름, 로마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 중 딸로 태어났다. 쌍둥이 형제는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였으며, 이후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와 이부형제 카이사리온(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 있었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쌍둥이 자녀를 만나 그들에게 각각 '헬리오스'(태양)와 '셀레네'(달)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셀레네'라는 이름은 이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로서 셀레우코스 왕조에 시집갔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1세)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리아 영토 분할과 부모의 몰락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며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영토 분할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분배받았다. 그러나 이 선언은 로마 원로원과 옥타비아누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패배한 후,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에 입성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결하고 카이사리온이 처형된 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두 형제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에서의 생활과 결혼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의 개선식에 강제로 참석했다. 개선식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포로가 아닌 가족으로 대우하기로 하고, 자신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전처)에게 맡겨 양육하게 했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로마에 도착한 지 몇 년 안 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 옥타비아의 집에는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의 아들로서 인질로 로마에 와 있던 유바 2세도 함께 살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유바 2세는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는 소 옥타비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두 사람을 결혼시키고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공동 통치자로 선임했다.
마우레타니아 통치
두 사람은 마우레타니아의 수도 이올(Iol)에 도착한 뒤 황폐화된 도시를 재건하고 카이사레아(Caesarea, 오늘날 알제리 셰르셸)로 개명했다. 로마의 문화를 본떠 체육관, 목욕탕, 극장 등 공공 시설이 건설되었고, 그리스-이집트 문화도 함께 유입되었다. 농업 진흥 정책과 무역 장려 정책을 통해 마우레타니아는 목재, 곡물, 티리안 보라색 염료 등의 고급 상품을 수출하며 번영을 누렸다. 이 시기 카이사레아 항구에는 알렉산드리아 등대를 모방한 등대가 건설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자신을 프톨레마이오스 군주로 칭했으며, 그녀의 모습이 새겨진 동전에는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딸"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로마의 적으로 규정한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는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마우레타니아 궁전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자녀와 사망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기원전 10년경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를 낳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을 별도로 두었다. 그녀는 기원전 5년에 사망했으며, 오늘날 알제리 체르셸에 위치한 마우레타니아 왕립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사후,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는 서기 23년 마우레타니아의 단독 왕위에 올랐으나, 서기 40년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 의해 암살되었고, 이후 마우레타니아는 로마에 병합되어 두 개의 속주로 분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