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헬레네 이머바르(Clara Helene Immerwahr, 1870년 6월 21일 ~ 1915년 5월 2일)는 독일의 화학자이다. 독일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 근교의 폴켄도르프에서 유대계 부모인 화학자 필리프 이머바르와 안나 크론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세 명의 형제자매(언니 엘리, 로제, 오빠 파울)와 함께 농장에서 성장했다.
1890년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한 후 아버지와 함께 브레슬라우로 이주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여성의 대학 입학이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이머바르는 1896년 청강생 자격으로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이후 8학기 동안 수학하여 1900년 리하르트 아베크의 지도 아래 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의 박사 논문 제목은 "수은, 구리, 납, 카드뮴 및 아연의 난용성 염의 용해도 측정에 관한 기여"(Beiträge zur Löslichkeitsbestimmung schwerlöslicher Salze des Quecksilbers, Kupfers, Bleis, Cadmiums und Zinks)였으며, 마그나 쿰 라우데(magna cum laude)로 졸업했다. 이는 브레슬라우 대학교 역사상 최초의 여성 박사 학위였다.
1901년 8월, 이머바르는 1897년 기독교로 개종한 후 프리츠 하버(Fritz Haber)와 결혼했다. 하버는 후에 암모니아 합성법 개발로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화학자였다. 결혼 후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그녀는 연구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으며, 남편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등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학문에 기여할 수 있었다. 1902년 6월 1일 아들 헤르만 하버를 낳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프리츠 하버는 독일 군부를 위해 염소 가스 등 화학 무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5년 4월 22일, 하버가 개발한 염소 가스가 벨기에 이프르 전투에서 최초로 대규모 군사적으로 사용되었다. 1915년 5월 2일, 이머바르는 베를린 달렘에 있는 자택에서 남편의 군용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녀의 사망 직후 하버는 동부 전선으로 떠나 추가 가스 공격을 지휘했다.
이머바르의 자살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의 화학 무기 연구를 "과학 이상의 왜곡"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이에 대한 항의의 의미에서 자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주장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으며, 불행한 결혼 생활, 개인적 우울감, 남편의 외도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당시 소규모 지역 신문만이 이 사건을 보도했으며, 사망 직후 리제 마이트너와 에디트 한이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그녀의 민감한 성격과 파탄난 결혼 생활이 주요 원인으로 언급되었다.
이머바르의 유해는 처음 베를린 달렘에 안치되었다가, 이후 프리츠 하버의 유언에 따라 스위스 바젤 인근 회르늘리 묘지로 이장되어 남편의 묘 옆에 함께 안장되었다. 아들 헤르만 하버는 1941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1946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90년대 이후 이머바르는 평화주의와 여성 권리의 상징으로 재조명되었다. 독일의 국제 의사 반핵 운동(IPPNW)은 1991년부터 클라라 이머바르 상(Clara-Immerwahr-Auszeichnung)을 제정하여 수여하고 있으며, 여러 도시에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조성되었다. 또한 여러 연극, 영화, 소설에서 그녀의 삶이 다루어졌다. 다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1993년 게리트 폰 라이트너가 출간한 전기에서 그녀를 확고한 평화주의자로 묘사한 점에 대해, 당시의 제한된 사료로는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