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코소보 전쟁

코소보 전쟁(알바니아어: Lufta e Kosovës, 세르비아어: Косовски рат)은 1998년 2월 28일부터 1999년 6월 11일까지 코소보 지역에서 벌어진 무력 분쟁이다. 이 전쟁은 전쟁 전 코소보를 통치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FRY)의 군대와,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의 분리주의 준군사조직인 코소보 해방군(KLA) 사이에서 벌어졌다. 분쟁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가 1999년 3월부터 공습 작전을 시작하며 개입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군이 코소보에서 철수하면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로 분류된다.

배경

코소보 전쟁의 기원은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간의 오랜 민족적 긴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77~1878년 니시 산자크 지역의 무슬림 알바니아인 추방을 비롯하여, 제1차 발칸 전쟁(1912~1913),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양 민족 간의 갈등은 반복적으로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코소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세르비아 공화국 내 자치주가 되었으며, 1974년 헌법에 따라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980년 티토 사망 이후 경제 위기와 민족주의 불안이 심화되었다. 1981년 프리슈티나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가 진압되었고, 1987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에서 세르브인 시위대에게 "아무도 다시는 당신을 때리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하며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의 자치권을 크게 축소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고, 이에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은 항의 시위를 벌였으나 진압되었다. 1990년대 초반, 세르비아 정부는 알바니아어 언론을 장악하고 알바니아 교사와 공무원을 대규모로 해고하는 등 차별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이브라힘 루고바가 이끄는 코소보 민주동맹(DLK)은 평화적 저항 전략을 취했으나,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쟁 발발

코소보 해방군(KLA)은 1990년대 초반 세르비아 정부의 탄압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 결성되었다. 1995년 데이턴 협정에서 코소보 문제가 제외되면서 평화적 저항 전략의 실패가 명확해진 이후 KLA는 첫 무장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7년 알바니아 내전으로 인한 무기 약탈 사태를 계기로 KLA는 대량의 무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1998년 초 KLA의 공격이 격화되자 세르비아 정규군과 경찰은 KLA 지지자와 정치적 반대자를 대상으로 한 보복 작전을 전개하였다. 1998년 3월 프레카즈에서 KLA 지도자 아뎀 야샤리와 주로 민간인인 6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은 국제사회의 대대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1998년 말까지 이 분쟁으로 약 1,500~2,000명의 민간인과 전투원이 사망하고, 약 37만 명의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이 실향민이 되었다.

국제사회의 개입과 랑부예 회담

1998년 9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 1199호를 채택하여 분쟁 당사자들에게 적대 행위 중단을 요구하였다. 1998년 10월 NATO의 활동 명령과 함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이행은 불안정했다. 1999년 1월 15일 라차크 학살 사건(45명의 알바니아계 코소보인 사망)은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1999년 2월 프랑스 랑부예에서 평화 회담이 열렸으나, NATO 병력의 코소보 주둔 조항을 둘러싸고 유고슬라비아 측이 거부하면서 3월 18일 협상은 결렬되었다. 알바니아, 미국, 영국 대표단은 랑부예 협정에 서명했으나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 대표단은 서명을 거부하였다.

NATO 공습 작전

1999년 3월 24일, NATO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승인 없이 인도주의적 근거를 내세워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중 폭격 작전(Operation Allied Force)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은 6월 11일까지 약 10주간 지속되었으며, 최대 1,000여 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어 38,000회 이상의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공습 중 1999년 5월 7일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이 폭격되어 중국 언론인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종전과 여파

1999년 6월 3일 밀로셰비치는 핀란드-러시아 중재팀이 제시한 국제 평화 계획의 조건을 수용하였다. 6월 9일 쿠마노보 협정이 체결되었고, 6월 10일 NATO는 공중 작전을 중단하였다. 6월 12일 NATO 주도의 평화 유지군(KFOR) 3만 명이 코소보에 진입하였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1244호에 따라 코소보는 유엔 행정부(UNMIK)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전쟁의 결과 약 120만~145만 명의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이 실향하였고, 전후 약 20만 명의 세르브인, 롬인 및 기타 비알바니아계 민간인이 코소보를 떠났다. 2015년 업데이트된 코소보 기억 책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분쟁으로 인해 총 13,535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이 중 10,812명은 알바니아인, 2,197명은 세르브인, 526명은 롬인 및 기타 민족이었다.

전쟁 범죄와 국제 재판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유고슬라비아 및 세르비아 관리 6명을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하였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인도에 반한 죄와 전쟁 범죄로 기소되었으나 판결 전에 사망하였다. KLA 측에서는 하르딘 발라가 수용소에서의 살인 및 고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01년 유엔 관리 대법원은 유고슬라비아군의 작전이 체계적인 테러와 강제 추방을 포함했으나 집단학살(genocide)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

군사적·정치적 결과

코소보 전쟁은 NATO의 첫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으로서 그 합법성과 정당성에 관한 논란을 남겼다. 독립 국제 위원회의 '코소보 보고서'는 "NATO의 군사 개입은 불법이지만 정당했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전쟁은 미군 무기고의 취약점을 노출시켰고, 이후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역에서의 군사적 개선으로 이어졌다. 코소보는 2008년 2월 17일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이 전쟁 직후 코소보의 법적 지위는 유엔 행정부 아래 유고슬라비아 영토 내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관련 훈장

NATO는 전쟁 이후 코소보 참전 NATO 훈장을 제정하였고, 미국은 2000년 5월 코소보 전역 기념장(KCM)을 별도로 제정하였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