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929년부터 1031년까지 이베리아반도(알안달루스)에 존재했던 이슬람 칼리파국이다. 안달루시아 아랍어로는 Khilāfat Qurṭuba, 라틴어로는 Caliphatus Cordubae, 스페인어로는 Califato de Córdoba라고 하였다. 수도는 코르도바였으며, 영토는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과 발레아레스 제도, 그리고 지브롤터 해협 건너 일부 북아프리카 지역에 걸쳐 있었다.
건국 배경
750년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아바스 왕조에 의해 멸망한 후, 오늘날 알제리·모로코·이베리아반도에 해당하는 이슬람 세계 서부 지역은 아바스 칼리파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아미르국(에미르국)으로 남았다. 756년 알안달루스의 아미르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우마이야 왕조의 계승을 자처하며 코르도바 아미르국을 건국하였다.
코르도바의 아미르들은 10세기 초까지 아미르 또는 술탄으로 불리며 알안달루스를 통치하였다. 909년에는 튀니지와 알제리 일대(이프리키야)를 중심으로 파티마 칼리파국이 건국되어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과 레반트 지역을 빠르게 석권하고 알안달루스를 침공하였다. 파티마 왕조가 스스로 칼리파를 자처하면서, 원칙적으로 칼리파를 따라야 하는 아미르라는 호칭으로는 이들의 침공에 대응하기 어려워졌다.
929년 코르도바의 아브드 알라흐만 3세가 스스로 칼리파를 자처하면서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이슬람 세계에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이프리키야의 파티마, 알안달루스의 코르도바까지 세 명의 칼리파가 동시대에 존재하게 되었다. 다만 아브드 알라흐만 3세의 칼리파 지위는 알안달루스를 벗어난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번영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건국 이후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아브드 알라흐만 3세는 알안달루스를 통합하고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과 외교 및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파티마 왕조의 추가 침공을 막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멜리야(927년), 세우타(931년), 탕헤르(951년) 등을 점령하였다. 이후 모로코 지역은 코르도바와 파티마 왕조 사이의 경쟁 지역이 되었다.
961년 아브드 알라흐만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알 하캄 2세가 칼리파 지위를 계승하였다. 알 하캄 2세는 학문과 문예 장려에 힘을 쏟았으며,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이 시기에 절정을 맞이하였다. 코르도바는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도시 중 하나로, 전성기 수도의 인구는 약 45만 명으로 추산된다.
몰락
976년 알 하캄 2세 사망 당시 그의 외동아들 히샴 2세는 겨우 10세였으나, 당시 하지브(총리)였던 알만수르 이븐 아비 아미르가 그를 칼리파로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실제 권력은 히샴 2세의 모후인 수브의 섭정과 알만수르에게 있었다. 이후 알만수르가 점차 실권을 장악하면서 히샴 2세의 칼리파 지위는 명목상의 호칭으로 전락하였다.
알만수르의 아들이자 후계 하지브였던 아브드 알라흐만 산추엘로가 1009년 북부 기독교 왕국들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각지의 군벌들이 권력을 두고 알안달루스 내전을 일으켰다. 1031년 마지막 칼리파였던 히샴 3세가 사망하면서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붕괴되었고, 코르도바 타이파국, 사라고사 타이파국, 세비야 타이파국 등 여러 타이파(분열 왕국)로 분해되었다.
문화와 학문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알안달루스 지역 문예와 학문의 중심지였다. 고대 그리스의 텍스트들이 아랍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번역되었으며, 히샴 2세 시기 궁전 도서관의 장서 수는 40만~50만 권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시기 스위스 장크트갈렌 수도원의 소장 도서가 약 100권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코르도바의 학문적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칼리파 스스로가 문예의 진흥자를 자처하며 궁정 전속 시인을 두었다.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딤미(이슬람 통치 아래 보호받는 비무슬림)로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허용하였고, 이들 역시 알안달루스의 문예 발전에 기여하였다. 유대인 학자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이 시기에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은 스페인 유대 문화의 황금기로 평가된다.
건축
아브드 알라흐만 3세는 요새화된 궁정 도시인 마디나트 알자흐라를 세웠다. 936년에 시작된 건축은 이후에도 계속 증개축되었으며, 대모스크·정부 청사·귀족 거주지·정원·조폐국·병영·공방·하맘(공중목욕탕) 등이 세워졌다.
962년에는 코르도바의 대모스크인 메스키타가 세워졌으며, 알 하캄 2세 시기에 예배 공간이 확장되고 돔과 미흐라브가 설치되는 등 당대 건축 기술의 혁신이 반영되었다. 이 메스키타는 훗날 가톨릭 대성당으로 개조되었다. 코르도바 칼리파국의 붕괴 이후에도 코르도바에서 제작된 기둥 주두(柱頭) 등의 건축 요소는 무라비트·알모하드 왕조가 전리품으로 가져가 모로코 등지의 건물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경제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지중해를 통해 다른 이슬람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주요 수출품은 곡물, 방직물, 도기, 금속세공품 등이었으며, 쌀·수박·바나나·가지·경질 밀 등이 수입되었다. 관개 농업을 위해 수차가 사용되었고, 유대 상인들이 혈연 관계와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지중해 전역에 무역망을 형성하여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구와 사회
코르도바 칼리파국의 인구는 서로 다른 민족·문화·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온 지배층은 소수였고, 군사력 유지를 위해 동원된 베르베르족과, 기독교 신자였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물라디가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모사라베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코르도바는 샤리아에 따라 다른 종교를 허용하였으나, 딤미인 기독교도와 유대인은 별도의 지즈야(인두세)를 내야 했다.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한 것은 히스파니아 로만 계통의 주민들로, 당시 약 600만~70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