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두 칸(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ᠬᠠᠢ᠌ᠳᠤ, 한국 한자: 孛兒只斤 海都, 키릴 문자: Хайду, 1230년/1234년 ~ 1301년 9월 26일/1302년 8월 25일)은 몽골 제국 제2대 대칸인 오고타이 칸의 손자이자, 오고타이의 다섯째 아들 카시의 아들로 태어난 몽골 제국의 황족이다. 그는 몽골 우구데이(오고타이) 칸국의 칸(재위: 1248년/1264년 ~ 1301년)이었으며, 1271년부터는 차가타이 칸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이기도 하였다.
생애 초반
카이두는 카라코룸에서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몽골어로 '두려움, 공포를 주는 자'라는 뜻이다. 아버지 카시는 일찍 사망하였고, 카이두는 조부 오고타이 칸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냉철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1251년 툴루이계의 몽케 칸이 대칸에 오르면서 오고타이계 왕자들에 대한 숙청이 발생하였다. 카이두는 이 과정에서 미리 몽케 칸에게 복종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타르바가타이 산 근처로 추방되었다. 이후 압해립지(현재 발하슈 호수 주변)를 영지로 받았다.
오고타이 가문의 당주와 쿠빌라이와의 대립
몽케 칸 사후(1259년),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사이에 칸위 계승 내전이 발생하자 카이두는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다. 1264년 아리크부카가 항복하고 2년 후 의문의 독살을 당하자, 카이두는 아리크부카의 계승을 선언하고 당숙뻘인 쿠빌라이 칸에 맞서 몽골 제국의 대권을 놓고 약 50년간 경쟁하였다.
카이두는 쿠빌라이가 몽골의 전통을 버리고 중국의 관습을 도입하였으며, 수도를 몽골고원이 아닌 외국(중국)으로 옮겼다는 점을 들어 반대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는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등과 연합하여 반쿠빌라이 동맹을 형성하였고, 1269년 탈라스강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스스로 몽골 제국의 대칸을 선언하였다.
원나라와의 전쟁
카이두는 1266년부터 1301년까지 원나라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1275년 위구르 지역을 정벌하여 복속시켰고, 1277년에는 몽케 칸의 아들 시리기가 진중에서 반란을 일으켜 쿠빌라이의 아들 노무간을 사로잡아 카이두에게 의탁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287년에는 동몽골의 나얀 등과 연합하여 쿠빌라이를 압박하였으나, 나얀이 패사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손자 테무르 올제이투(원 성종)가 즉위한 이후에도 카이두는 원나라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지지 세력의 이탈과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세력이 점차 축소되었다.
최후
1301년, 카이두는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 아리크부카의 아들 멜릭 테무르와 함께 카라코룸 점령을 위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쿨룩 칸 카이산(훗날 원 무종)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퇴각하던 중 부상 후유증과 요통 합병증으로 1301년 9월 26일(또는 1302년 8월 25일) 카라코룸 근처에서 사망하였다.
평가와 영향
카이두는 몽골의 전통적 유목 생활 방식을 수호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오랜 저항은 원나라와 서방(중앙아시아, 유럽) 간의 교역로와 역참 체계를 대부분 차단시켰으며, 이로 인해 원나라와 서방 간의 경제·문화 교류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의 사후 우구데이 칸국은 차가타이 칸국과 원나라의 협공으로 붕괴되었고, 우구데이 가문은 사실상 몰락하였다.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서는 그를 '콰이두'로 표기하였으며, 당대 몽골인들은 그를 '하이두'로 불렀다. 그의 딸 쿠툴룬은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모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바인골린 몽골 자치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카이두 강(開都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