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Karl Amadeus Hartmann, 1905년 8월 2일 ~ 1963년 12월 5일)은 독일의 작곡가이다. 뮌헨에서 태어나고 사망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현대음악 재건의 핵심 인물로 평가된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를 20세기 독일 최고의 교향곡 작곡가로 묘사하기도 한다.
생애
하르트만은 1905년 8월 2일 독일 뮌헨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 넷 중 셋이 화가가 되었으며, 하르트만 자신도 초기에는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노동자 혁명(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의 실패를 목격하면서 그의 정치적 의식이 형성되었고, 이후 생애 내내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로 남았다.
1920년대 뮌헨 아카데미에서 막스 레거의 제자인 요제프 하스에게 작곡을 사사했으며, 쇤베르크 학파와 가까웠던 지휘자 헤르만 셰르헨으로부터 지적 자극과 후원을 받았다. 나치 정권 시기에는 독일에 머물면서도 독일 내 음악 활동에서 완전히 물러나 자발적 내적 망명(inner emigration)을 택했고, 자신의 작품이 독일에서 연주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초기 교향시 《미제레》(Miserae, 1933~34)는 다하우 강제수용소 희생자들에게 헌정되었으며 나치 정권의 비난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빈에서 안톤 베베른에게 사사하기도 했으나, 개인적·정치적 차원에서 베베른과 자주 의견이 갈렸다고 알려져 있다.
전후 하르트만은 나치와 협력하지 않은 소수의 저명한 반파시스트 인사 중 하나로, 1945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드라마투르크로 임명되었다.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1945년 11월부터 뮌헨에서 운영한 현대음악 연주회 시리즈 '무지카 비바'(Musica Viva)이다. 이 시리즈는 1933년 이후 나치의 미학 정책으로 금지되었던 20세기 레퍼토리를 독일 대중에게 재소개했으며, 한스 베르너 헨체, 루이지 노노, 루이지 달라피콜라, 카를 오르프, 이아니스 크세나키스, 올리비에 메시앙, 루치아노 베리오, 베른트 알로이스 치머만 등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장을 제공했다.
하르트만은 전후 여러 차례 영예를 받았다. 1949년 뮌헨 시 음악상, 1950년 바이에른 예술아카데미 예술상, 1954년 IGNM 아르놀트 쇤베르크 메달, 1957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대예술상, 1959년 바이에른 공로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1950년대에는 동독으로의 이주 제안을 거절했다. 말년에는 행정 업무와 질병으로 작곡 시간이 줄었으며, 1963년 위암으로 5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장편 교향곡적 《노래 장면》(Gesangsszene)은 장 지로두의 희곡 《소돔과 고모라》의 텍스트에 기반한 작품으로 미완성으로 남았다.
작품과 음악적 특징
하르트만은 8개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그의 교향곡들은 여러 차례 개정을 거친 경우가 많았으며, 1930년대 후반과 전쟁 기간 동안의 관현악 작품 상당수를 스스로 억제하거나 번호가 매겨진 교향곡으로 재편성했다. 가장 자주 연주되는 교향곡은 현악을 위한 4번과 6번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작곡된 바이올린과 현악을 위한 《장송 협주곡》(Concerto funebre)이다. 이 작품은 후스파 코랄과 1905년 러시아 혁명가를 활용한다.
그의 음악은 표현주의와 재즈 양식화를 브루크너와 말러의 전통에 따른 유기적 교향곡 형식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 특징지어진다. 초기 작품은 풍자적이고 정치적으로 참여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는 바흐의 대위법적 기교, 말러의 심오한 표현적 아이러니, 스트라빈스키와 힌데미트의 신고전주의를 존경했다. 1930년대에는 헝가리에서 바르토크와 코다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1940년대에는 쇤베르크식 12음 기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베베른에게 사사했지만 그의 음악적 어법은 알반 베르크에 더 가까웠다. 1950년대에는 보리스 블라허와 엘리엇 카터가 개척한 운율적 기법을 탐구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형식으로는 3부 구조의 아다지오 느린 악장, 푸가, 변주곡, 토카타 등이 있다.
주요 작품
- 교향곡 1번 《레퀴엠의 시도》(Versuch eines Requiems, 1955년 개정) — 월트 휘트먼의 시에 기반
- 교향곡 2번(1946), 3번(1948~49), 4번(1947~48, 현악), 5번 《교향 협주곡》(1950), 6번(1951~53), 7번(1957~58), 8번(1960~62)
- 교향시 《미제레》(1933~34)
- 바이올린과 현악을 위한 《장송 협주곡》(1939, 1959년 개정)
- 피아노, 관악기, 타악기를 위한 협주곡(1953)
- 비올라, 피아노, 관악기, 타악기를 위한 협주곡(1954~56)
- 현악 4중주 1번 《카리용》(1933), 현악 4중주 2번(1945~46)
- 피아노 소나타 2번 《1945년 4월 27일》(1945) — 전쟁 종전 시 연합군으로부터 이끌려 나가는 다하우 수용소 수감자 2만 명을 묘사
- 오페라 《심플리시우스 심플리시시무스》(1934~35, 1956~57년 개정)
- 바리톤과 관현악을 위한 《노래 장면》(1962~63, 미완성)
평가와 유산
하르트만 사후 그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주요 서독 지휘자가 없었고, 그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였던 셰르헨이 1966년에 사망하면서 그의 음악은 사후 한동안 공공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지적이 있다. 라파엘 쿠벨리크와 페르디난트 라이트너가 그의 교향곡을 정기적으로 연주했으며, 이후 잉고 메츠마허와 마리스 얀손스 등이 그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주했다. 영국 작곡가 존 매케이브는 하르트만 4번 교향곡의 서두를 주제로 한 《카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1964)을 그에게 헌정했다. 한스 베르너 헨체는 하르트만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관현악 편성으로 편곡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