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Walk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은 1077년 1월 25일부터 1월 28일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찾아가 용서를 구한 사건을 말한다. 중세 유럽에서 교황권과 황제권이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배경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강력한 교회 개혁을 추진하며, 세속 군주들이 관습적으로 행사해 오던 성직자 임명권, 즉 서임권을 교회로 되돌리려 하였다. 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반발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1076년,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를 돕는 귀족이나 사제 역시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파문의 여파로 많은 독일 귀족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서 등을 돌렸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하인리히 4세는 위기에 몰렸다.
사건의 경과
1076년 겨울,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가 자신을 몰아내려 오는 것으로 오해하고 두려워했으나, 카노사 성의 백작부인 마틸데가 교황을 자신의 성으로 초청하여 보호하였다. 마틸데는 서임권 분쟁에서 교황을 열렬히 지지한 인물이었다.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를 넘어 쥐라산맥을 통과한 후, 황제의 위엄을 버리고 수도사들이 입는 거친 고해복을 입고 맨발로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문 앞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그를 성 안으로 들이지 않았고, 하인리히는 3일 동안 성문 앞에서 맨발로 눈밭에 서서 금식하며 교황의 용서를 기다렸다. 결국 1월 28일, 교황은 하인리히를 성 안으로 들여보냈고(일설에 의하면 하인리히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전해짐), 그날 밤 마틸데와 하인리히는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함으로써 파문이 해제되었다.
사건 이후
카노사에서 굴욕을 겪은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이 취소된 후 즉시 독일로 돌아갔으나, 독일 제후들은 라인펠트의 루돌프를 대립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인리히는 내전을 치른 끝에 승리하였고, 1080년 교황이 그를 다시 파문했으나 이번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1084년 로마를 탈환하였고,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킨 후 자신이 세운 클레멘스 3세를 교황으로 옹립한 뒤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 지도자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노르만 군대의 로마 약탈이 발생하여 로마 시민들의 원성을 샀고, 결국 교황은 망명길에 올라 1085년 살레르노에서 객사하였다.
역사적 의미
카노사의 굴욕이 교황권의 항구적인 승리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인리히 4세는 이후 교황을 폐위시키며 복수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세 유럽에서 세속 권력이 교회에 굴복한 상징적인 장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9세기 후반,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 가톨릭 교회 세력에 맞서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일 때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라고 연설한 것은 이 사건을 빗댄 표현으로, 독일이 외세(로마 교황청)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오늘날 '카노사로 가다'(영어: go to Canossa, 독일어: nach Canossa gehen)라는 표현은 하기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