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고(种暠, 103년 ~ 163년 음력 2월)는 중국 후한(後漢) 중기에서 말기에 활동한 관료이다. 자는 경백(景伯)이며, 하남윤 낙양현(雒陽縣) 출신이다. 중산보(中散大夫)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도령(定陶令)을 지냈다.
생애
발탁
충고는 가산이 3천만 금에 달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는 재산을 일족과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명성과 이익을 좇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는 현의 문하사(門下史)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하남윤 전흠(田歆)이 효렴(孝廉)에 천거할 인재를 찾는 과정에서 외조카 왕심(王諶)의 소개로 충고를 알게 되었다. 왕심이 충고를 비범한 인재로 소개했지만 전흠은 처음에는 이를 웃어넘겼다. 그러나 왕심이 "산천에 반드시 인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인재가 반드시 산천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재차 권하자, 전흠은 충고를 주부(主簿)로 삼았다. 충고는 곧 효렴에 천거되어 태위부(太尉府)에 벽소되었고, 고제(高第)로 천거되었다.
관직 생활
영화 6년(141년), 충고는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두교(杜喬)·주거(周舉)·장강(張綱) 등 여덟 명의 관리가 각지의 비리를 조사하도록 파견되었으나, 대장군 양기(梁冀)와 환관들의 탄원으로 순제(順帝)가 이들의 적발 상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충고는 스스로 이를 조사하여 두교 등이 탄핵한 촉군태수 유선(劉宣) 등의 잘못을 밝혀냈고, 삼공과 대장군 부서에서 친족을 자사나 태수로 삼은 자들 중 재산을 감춘 자를 적발할 것을 상주하여 순제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충고는 태자를 보살피는 임무를 맡았다. 중상시(中常侍) 고범(高梵)이 수레를 대동하여 조서 없이 태자를 맞이하려 하자, 태부 두교는 환관을 두려워하여 제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충고는 두교에게 태자가 장차 제위를 이을 분이니 목숨을 걸어야 하며, 조서도 없는 상황에서 고범이 간사한 일을 꾸밀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고범은 결국 급히 돌아가 순제에게서 조서를 받아 태자를 찾아갔다. 이 일로 두교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했고, 순제는 충고를 크게 치하하여 그 명성을 오랫동안 떨쳤다고 전한다.
연희 4년(161년)에는 대사농(大司農)에서 사도(司徒)로 승진하였다.
사망
충고는 연희 6년(163년) 음력 2월 무오일에 재임 중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충불(种拂)과 손자 충소(种劭)는 모두 후한 조정을 위하여 병력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가 및 기록
충고의 생애와 행적은 《후한서》(後漢書) 권56「장왕충진열전」(張王种陳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재물을 탐하지 않고 간신과 타협하지 않으며, 태자의 안전과 국가의 공정한 통치를 위해 목숨을 건 간언(諫言)을 아끼지 않은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조서 없이 태자를 찾아온 중상시를 제지한 일화는 그가 직언(直言)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품이었음을 보여준다.
참고 자료: 범엽(范曄) 저, 《후한서》(後漢書) 권56「장왕충진열전」(張王种陳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