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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명

최춘명(崔椿命, 생년 미상~1250년 9월 8일)은 고려 고종 때 침입한 몽골군에 맞서 싸운 고려의 무인이자 관료이다. 한자 표기가 문헌에 따라 崔椿命 또는 崔春明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

최춘명의 출생 연도와 출생지는 정확히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으며, 생애 초기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등을 지낸 최혁(崔奕)이다.

고려 고종 18년(1231) 제1차 고려-몽골 전쟁 시기에 최춘명은 자주부사(慈州副使)로 재임 중이었다. 이때 몽골군이 자주성을 포위하자, 그는 향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성을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자주성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몽골군은 성을 포기하고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최춘명은 몽골군을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몽골군이 다시 자주성을 공격했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몽골군의 사령관 살리타이(撒禮塔)가 이끄는 군대가 개경을 포위하자 고려 조정은 몽골군에 항복하였고, 조정은 내시낭중(內侍郞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 최춘명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최춘명은 이를 거부하고 성문을 닫고 응하지 않았다. 이후 몽골 측이 회안공 왕정을 통해 대집성을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권고했으나, 최춘명은 화살을 쏘아 보내 항복 요구를 거절하였다. 결국 몽골군은 자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1232년(고종 19) 몽골로 철수하였다.

몽골군이 물러난 뒤, 몽골의 명령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당시 고려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와 그의 장인인 대집성은 최춘명을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몽골 관리의 만류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며, 그 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발탁되었다. 그는 1250년(고종 37)에 사망하였다.

가족 관계

  • 아버지: 최혁(崔奕) —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역임
  • 아들: 최념(崔恬) — 위위경(衛尉卿) 역임
  • 손녀사위: 박전지(朴全之) — 연흥군(延興君)

평가 및 관련 자료

최춘명의 행적은 《고려사》 권103 〈열전〉16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활약은 여몽전쟁 초기 고려 측의 저항 사례로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등 공식 역사 자료에 등재되어 있다. 관련 연구로는 강재광의 논문 〈대몽전쟁기 1231년 자주성전투의 성격과 자주부사 최춘명의 활약〉(《한국사 연구》 186, 2019년)이 있다.

일부 대중 매체와 온라인 콘텐츠에서는 그의 일대기가 드라마틱하게 서술되기도 하나, 본인이 직접 쓴 저술이나 후대의 회고록 등 1차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최춘명의 출생·가족·일상적 삶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기록 부족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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