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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청 야구단

철도청 야구단은 1913년부터 1978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실업 야구단이다. 공식적인 백과사전 및 사료에 기록이 존재하는 실재 역사적 구단으로, 한국 실업 야구의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창단 배경

철도청 야구단의 기원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오지마(大島勝太郞)가 저술하고 당시 철도도서관 주사였던 임정일이 서문을 작성한 《조선 야구사》에 따르면, 팀은 1913년 봄에 창단되었으며 이듬해인 1914년에 조선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창단 초기에는 각 지부별로 야구단이 조직되어 철도운동장에서 부서 간 대항 야구대회가 열렸으며, 1926년 기준으로 12개 지부 18개 팀이 출전할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었다. 결승전에는 평양철도 야구단과 부산철도 야구단이 오르는 등 지방 지부 팀들도 활약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야구단은 조선 야구계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 중 하나였으나, 활동 선수의 대부분이 재조선 일본인이었으며 소수의 조선인 선수들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일본인 중심의 구단이었다. 따라서 이 팀은 당시 조선인 야구단들에게는 극복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재편성

해방 이후 1946년, 철도국이 확대 개편된 미군정청 운수국의 명의로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야구용품을 바탕으로 한국인 선수들로 팀이 재구성되었다. 당시에는 '조선운수 야구단'이라는 명칭이 먼저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팀은 '철도 야구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후 1948년에는 교통부 야구단으로 이어졌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해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전후인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약 2년간 재활동했으나 지원 부족으로 다시 해체되었다.

철도청 시절

1959년 가을, 서울실업야구연맹 발족에 맞춰 팀이 재창단되었으며, 이후 교통부에서 철도청으로 팀이 이관되면서 '철도청 야구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3년 철도청이 교통부의 외청으로 독립하면서 철도청 야구단이라는 명칭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철도청이 적자로 전환되면서 구단에 대한 지원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1977년에는 철우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1978년에는 자회사인 홍익회로 구단을 이관했으나 그 해에 해체되었다.

해체 배경

1970년대에는 롯데, 포철 등 굴지의 대기업들이 새로운 야구단을 창단하면서 유망주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는 상황이었다. 반면 철도청 야구단(이후 홍익회)은 당시 실업 야구단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선수들의 신분이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이었으며 승리 수당도 지급되지 않았다. 해체 직전 3시즌 연속 승률이 3할에 미치지 못하는 등 성적도 저조했다.

주요 인물

이 구단 출신으로는 한국 야구사 최초의 언더핸드 투수로 알려진 남궁택경이 철도청 야구단의 에이스로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후에 삼미-청보(1983~1985)와 롯데(1990) 감독을 역임한 김진영이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철도국 및 철도청 야구단에서 활약했으며, OB 베어스 내야수였던 유지훤이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이 팀에서 뛰었다. 그 외에 김광철, 김구길, 황태환, 금광옥, 임호균 등이 철도청 야구단에서 활동한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 의의

철도청 야구단은 1913년 창단부터 1978년 해체까지 약 65년간 존속하면서, 한국 야구의 초기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실업 야구의 전성기였던 1960~70년대까지 한국 야구사의 흐름을 함께한 구단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초기 최강팀으로서의 위상과 해방 이후 한국인 선수들로 재편된 과정은 한국 야구 발달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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