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세헌(千世憲, 1879년 5월 17일 ~ 1945년 6월 14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형양(潁陽, 영양)이며, 자는 종백(宗伯)이다. 경상도 상주목 산동면 경외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부암리)에서 아버지 천병우(千秉祐)와 어머니 영월 엄씨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5년부터 1901년까지 경상도 선산(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2년 상경하여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일어과에 입학하였다.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모집에 지원하여 하와이로 이주하였으며, 약 3년간 농장에서 노동한 후 1907년부터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0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여 해외 한인 최고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 뉴욕지회에 가입하였고, 1914년에는 안창호, 송종익 등이 창립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에 참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지와 후원, 승인 요구, 외교사무소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1921년에는 서재필 등과 함께 대한민족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고 동포들로부터 특별의연금을 모금하여 대표단의 외교선전 경비에 충당하였다. 1922년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하이로 파견되어 임시의정원에 국민대표회 추진운동 지원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같은 해 7월 안창호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내 각 단체들의 입장을 조정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1923년부터 17년간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한인 동포들의 생활과 자치활동을 적극 후원하여 '한인들의 은사'로 불리었다. 1933년 시카고에서 일본인 마쓰에(松江) 처단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40년 7월 강영승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의회를 설립하고 서기대표로 활동하면서 중국군대 후방공작을 협조하였다. 1942년에는 서재필의 서신을 받고 미국 군사정보부와 미주 한인들의 대일참전 문제를 협의하였다.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각종 독립금과 기성금을 출연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45년 6월 14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였으며, 광복을 두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초기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안장되었던 유해가 1996년 10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