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拓俊京, 1062년~1144년)은 고려 중기의 무신이자 관리로,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황해도 곡주(谷州, 현재 황해북도 곡산군) 출신이며,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척위공(拓謂恭)의 아들이다. 곡산 척씨(谷山拓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척준경은 가난한 향리 집안 출신으로 학문을 제대로 닦지 못했고, 서리(胥吏)가 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이후 왕자 시절의 숙종(肅宗)을 섬기게 되어 1095년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로 벼슬길에 올랐다.
척준경의 본격적인 출세는 여진(女眞) 정벌에서 비롯되었다. 1104년(숙종 9) 임간(林幹)의 군대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정주성(定州城)이 위기에 처했을 때, 척준경은 적장을 베는 등 분전하여 군사들을 구출하였다. 1107년(예종 2)에는 윤관(尹瓘)을 따라 17만 대군의 여진 정벌에 종군하여 석성(石城), 영주(英州), 길주(吉州) 등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가한촌(加漢村) 전투에서 여진족에게 포위된 윤관을 정예병력을 이끌고 구출하는 활약을 보였다. 이로 인해 척준경은 고려 최고의 용맹을 가진 무장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여진 정벌 이후에도 척준경은 요(遼)나라의 출병 요청에 반대하는 등 신중한 대외 정책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정치적 파란이 많았다. 척준경의 딸이 당대 최고 문벌인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지원(李之元)과 혼인하여 사돈 관계를 맺게 되면서, 그는 이자겸과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1126년(인종 4) 인종(仁宗) 측근 세력인 김찬(金粲) 등이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려는 거사를 일으키자,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궁궐에 불을 질러 상당 부분을 소실시켰고, 아우 척준신(拓俊臣)과 아들 척순(拓純)을 잃었다. 이후 인종이 이자겸과 척준경을 이간질시키는 계책을 펼치자, 척준경은 뜻을 바꾸어 이자겸을 체포하고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 공으로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에 봉해지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등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1127년(인종 5)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의 죄"라는 이유로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고향 곡주로 옮겨졌다. 1130년에는 처자에게 직전(職田)이 돌려지는 등 일부 복권이 이루어졌고, 1144년(인종 22)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로 기용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사후인 1146년(인종 24) 문하시랑평장사로 추복(追復)되었다.
척준경의 일생은 가난한 향리 출신의 무인이 여진 정벌을 계기로 최고 관직에 오르는 고려 사회의 신분 상승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동시에 이자겸의 난이라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권력의 정점과 몰락을 모두 경험한 인물로서, 그의 일생은 고려 사회의 역동적 측면과 한계를 함께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