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인으로, 영조와 정조 연간에 활약한 남인계의 지도자이다.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채응일(蔡膺一)이다.
1735년(영조 11) 향시에 급제하고,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대사간·대사헌·경기감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758년에는 도승지로 재임하던 중 영조가 사도세자 폐위 비망기를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만류하여 이를 철회시켰으며, 이로 인해 영조로부터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전한다. 1762년 사도세자가 사망할 당시에는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조 사후에는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 처단 과정의 옥사를 처결하였다. 정조 시대에는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고, 이후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며 정조의 탕평정치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조전랑의 자대제 혁파, 신해통공정책 등의 시행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문적으로는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면서도 양명학·불교·도교 등에 대해 수기치인의 측면에서 선용할 수 있다면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처단이 아닌 교화 우선의 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저서로는 『번암집』 59권이 전하며, 『경종개수실록』, 『영조실록』, 『국조보감』의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말년에는 주로 수원성역(水原城役)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고, 1799년 1월 18일 사망하였다. 사후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를 계기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으며, 초상 일괄은 2006년 대한민국 보물 제1477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