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車智澈, 1934년 11월 6일 ~ 1979년 10월 26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용천(龍川)이다.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1934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한 차지철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1953년 사병으로 입대한 후 갑종간부후보생(74기)으로 소위 임관하여 포병 장교로 복무하였다. 미국 육군 포병학교와 보병학교(레인저 스쿨)를 수료하였고, 공수특전단에서 대위로 근무하던 1961년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였다. 이후 박정희의 경호장교로 발탁되었고, 1962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제6대 국회에 진출한 이후, 제7대(경기 광주·이천), 제8대(경기 광주·이천), 제9대(경기 여주·광주·이천) 국회의원을 연임하여 4선 의원을 지냈다. 1969년에는 35세의 나이로 국회 외무위원장을 지내며 의정 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 기록을 세웠다. 학력으로는 국학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육영수 여사 사망)으로 경호실장 박종규가 물러나자, 차지철이 후임으로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경호실장 재직 중 경호실장 직위를 장관급으로 격상시켰고, 경호실 산하에 정보 조직을 운영하였으며,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지휘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을 개정하는 등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국회, 행정부, 군 인사 등에 깊숙이 개입하며 유신 정권 말기 사실상의 2인자로 군림하였다.
10·26 사건과 최후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극심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차지철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김재규가 발포하여 차지철은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도 함께 피살되었다(10·26 사건). 당시 향년 44세였다.
평가
차지철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박정희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막대한 권력을 휘두른 점, 강경 진압 일변도의 대응을 주장한 점, 경호실장으로서 경호 대상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점 등이 주요 비판 대상이다. 사후 그의 유해는 국립묘지 안장이 취소되어 영락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