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림(陳琳, ?~217)은 중국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에 활동한 문관이자 문학가로, 자는 공장(孔璋)이다. 서주 광릉군 사양현(현 장쑤성 화이안시) 출신이다. 미려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진림은 처음에 대장군 하진(何進)의 휘하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하진이 원소의 계책에 따라 동탁 등 외부 군대를 소집하려 하자, 진림은 "무기를 거꾸로 들어 남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격"이라며 이를 극구 반대했으나 하진이 듣지 않았다. 이후 하진이 암살되자 기주로 도망가 원소(袁紹)를 따랐다.
원소 휘하에서 진림은 심복이 되어 문서 작업을 담당했다. 195년 동군태수 장홍이 원소에게 반기를 들자 진림이 항복을 종용하는 편지를 썼고, 장홍이 이를 조목조목 반박한 일화가 있다. 199년 원소가 공손찬을 포위했을 때는 공손찬의 구원 요청 서신을 가로채 내용을 조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관도대전이 벌어지기 전에는 조조의 죄상을 규탄하는 선전문인 '토조조서(討曹操書)'를 작성했는데, 이 글은 조조뿐 아니라 그의 부친 조숭과 조부 조등까지 신랄하게 비난한 내용으로, 당사자인 조조마저 감탄할 정도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원소 사후 원상(袁尙)을 거쳐, 원상이 패하자 조조(曹操)에게 투항했다. 조조가 "나만 까면 되었지 어찌 조상의 대에까지 소급했느냐"고 꾸짖자, 진림은 "시위가 당겨진 화살은 쏘아지지 않을 수 없소"라고 변명했다. 조조는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 사공군모좨주(司空軍謀祭酒)로 임명하여 문서 작성을 맡겼다. 조조 휘하에서 진림은 국가의 포고령, 군사문서, 격문 등을 담당했으며, 조조는 그의 글을 볼 때마다 지병인 두통조차 잊을 정도로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문하독(門下督)으로 옮겼다가 217년 역병으로 사망했다.
문학적 평가와 관련하여, 조비(曹丕)는 진림의 문장이 "탁월하지만 조금 번잡하다"고 평했으며, 후대 안지추(顔之推)는 《안씨가훈》에서 진림이 원소 밑에서는 조조를 이리나 승냥이로 비유하다가 조조 휘하로 들어가자 원소를 뱀과 살모사로 비유한 점을 지적하며 문인의 고민이자 부끄러운 처신이라고 평가했다. 현존하는 그의 시로는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 〈유람시(遊覽詩)〉 2수, 〈연회시(宴會詩)〉 등 총 4수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