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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1세

지그문트 1세(폴란드어: Zygmunt I Stary, 리투아니아어: Žygimantas Senasis, 1467년 1월 1일 ~ 1548년 4월 1일)는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1506년부터 1548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였다. 그는 야기에우워(Jagiellon) 왕조 출신의 군주로, 폴란드어로 '늙은이'를 뜻하는 '스타리(Stary)'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별칭은 후대의 역사학에서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지그문트 1세는 1467년 1월 1일 폴란드 코지에니체에서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 카지미에시 4세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엘리자베타 사이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외증조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형들이 먼저 왕위를 계승하면서 처음에는 왕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으나, 형들의 잇따른 사망으로 1506년 39세의 나이에 폴란드 국왕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지그문트 1세는 내정과 외교에서 여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내정 측면에서 그는 1527년 상비군을 창설하고 재정·행정 개혁을 추진하여 약화되었던 왕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니힐 노비(Nihil novi) 헌법과 같은 귀족의 권리와 의회 제도를 인정하면서 귀족 세력과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1537년에는 폴란드 귀족들이 르부프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닭의 전쟁(Wojna kokosza)'이 발생했으나, 귀족들의 요구는 대부분 기각되고 일부 원칙만 수용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외교적 측면에서 그는 1525년 크라쿠프 조약을 통해 튜턴 기사단을 세속화하고, 조카인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을 프로이센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의 폴란드 종주권을 확립하였다. 이는 폴란드 역사에서 '프로이센의 공물'로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또한 1526년 마조프셰 공국과 바르샤바를 폴란드 왕국에 합병하였다. 동부 국경에서는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1514년 오르샤 전투의 승리를 거두었고, 1531년에는 몰도바를 상대로 오베르틴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국경을 강화하였다. 1515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1524년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문화적 측면에서 지그문트 1세는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적극 후원하였다. 특히 1517년 결혼한 두 번째 아내인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보나 스포르차 여왕은 이탈리아의 예술가, 건축가, 조각가들을 폴란드로 초청하여 폴란드 르네상스 문화의 번성을 이끌었다. 크라쿠프의 바벨 성의 르네상스식 개축과 바벨 대성당의 지그문트 예배당(1519~1533) 건립은 이러한 문화적 성과를 대표한다. 그가 1521년에 설치한 무게 약 12.6톤의 '왕실 지그문트 종(Sigismund Bell)'은 현재까지도 폴란드의 국가적 상징으로 남아 있다.

지그문트 1세는 두 차례 결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헝가리 귀족 출신의 바르바라 자폴리아(1512년 결혼, 1515년 사망)였고, 두 번째 부인인 보나 스포르차와의 사이에서 아들 지그문트 아우구스트(후일 지그문트 2세)를 비롯한 자녀들을 두었다. 생전 정부(情婦) 카타지나 텔니찬카와의 사이에서도 세 명의 사생아가 있었다. 1529년에는 아들 지그문트 아우구스트를 생전에 공동 국왕(vivente rege)으로 지명하여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였다.

지그문트 1세는 말년에 통풍과 류머티즘 등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정신은 온전히 유지하며 정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1548년 4월 1일 부활절에 크라쿠프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왕위를 계승하여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 되었다. 지그문트 1세의 42년에 걸친 재위는 폴란드 르네상스와 폴란드 황금기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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