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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산 전투

주필산 전투(駐蹕山戰鬪)는 645년(고구려 보장왕 4년)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주요 회전이다. 전투명은 당 태종 이세민이 이 전투 당시 군대를 주둔시킨 산의 이름을 '주필산'(駐蹕山, 임금이 머무른 산)으로 개명한 데서 유래하였다.

배경 643년, 당 태종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신라의 성을 공격한 것을 항의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거부하자,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명분으로 삼아 고구려 정벌을 결정하였다. 645년 당군은 수륙 양면으로 요동 지역을 침공하여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 등을 연이어 함락시켰다. 이후 당군은 안시성(安市城) 방면으로 진격하였고, 이에 연개소문은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真) 등에게 15만 대군을 맡겨 안시성 구원에 나서게 하였다.

전투 경과 645년 6월 20일(음력), 고연수와 고혜진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안시성 부근에 도착하였다. 당 태종은 고구려군의 전략을 세 가지로 예측하였는데, 상책은 안시성과 연결하여 보루를 쌓고 장기전을 펴는 것, 중책은 야간 도주, 하책은 무리하게 당군과 정면 대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고연수가 하책을 택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고구려의 대대로 고정의(高定義)는 장기전을 통해 당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고연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당 태종은 돌궐 기병 1천을 보내 유인전을 펼쳤고, 고구려군은 이에 속아 안시성 동남쪽 8리(약 3.1km)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당 태종은 다시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할 뜻이 없다"고 거짓으로 전하게 하여 고구려군을 방심시켰다.

6월 21일 밤, 당 태종은 이세적(李勣)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정예병 1만 1천을 주어 기습 부대로 삼아 고구려군의 배후를 공격하게 하였다. 당 태종 자신은 보병과 기병 4천을 이끌고 북쪽 산에 올라 북과 나팔 소리를 신호로 삼아 일제 공격을 명령하였다.

6월 22일, 당군이 사방에서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고구려군은 약 2만여 명이 전사하였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산에 의지해 방어하였으나, 당군이 퇴로를 차단하자 6월 23일 3만 6,800명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병력 규모 당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학계에 이견이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당군이 16만에서 30만에 달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기존 사료에 나타난 3만 규모가 더 타당하다는 분석이 있다. 고구려군은 공식적으로 15만이었으나, 실제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다수의 기병으로 구성된 약 5만에서 7만 명으로 추정된다.

결과 및 영향 당군은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말 5만 필, 소 5만 두, 철갑 1만 벌 등을 노획하였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에 투항하였다. 당 태종은 항복한 고구려 장수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말갈인 3,300명은 생매장하였다. 그러나 이 승리 이후 당군은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였고, 설연타(薛延陀)의 위협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645년 9월 고구려에서 철수하였다. 주필산 전투는 고구려 주력군이 큰 타격을 입은 중요한 전투였으나, 전쟁의 최종 결과를 당의 승리로 이끌지는 못하였다.

학계의 쟁점 주필산 전투에 관한 기록은 주로 중국 측 사서인 《구당서》, 《신당서》 및 《삼국사기》에 의존하고 있어, 고구려군의 실제 총사령관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고연수와 고혜진이 선봉이었을 뿐, 실제 총지휘관은 대대로 고정의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한 전투 이후 안시성 전투와의 연계 과정, 고구려군이 실제로 전멸하지 않았다는 점 등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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