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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기의 교육

종교개혁기의 교육은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유럽, 특히 북유럽에서 전개된 교육활동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교육은 종교개혁 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인문주의의 영향 아래 교육의 대상이 소수 성직자에서 일반 대중으로 확대되고, 교육의 주체가 교회에서 국가로 이행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시대적 배경

종교개혁 이전 북유럽, 특히 신성 로마 제국(독일 지역)에서는 14세기 중반 이후 여러 도시에 대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프라하 대학교(1348), 빈 대학교(1365)를 시작으로 하이델베르크, 쾰른, 에르푸르트, 라이프치히, 비텐베르크 등지에 대학교가 세워졌다. 이들 대학교는 파리 대학교를 모델로 하였으나 보다 세속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인문주의적 관심을 가진 군주들의 후원을 받아 중세적 성격에서 탈피하는 학교도 나타났다. 이러한 대학교에서 인문학 연구가 확산되면서 초중등교육기관의 성격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초기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기존의 교육기관을 그대로 운영하는 데 머물렀고, 교회조직 변화에 따른 학교 조직의 사소한 변화만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북부 유럽 문예부흥(인문주의)의 직접적 산물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교육적 이상은 유럽 인문주의자들의 이상에서 도출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교육적 이상

종교개혁기 교육 재건 사업은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루터는 1524년 「독일 내의 모든 도시의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에게 보내는 기독교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촉구하는 서한」에서 교육에 대한 신념을 상술하였고, 이후 「아동의 취학의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국가가 학교를 설립하고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동을 취학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교육 사상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가 학교를 설립하고 공공의 비용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공교육 개념을 제시하였다. 둘째, 무상·무제한적 교육을 주창하였으며, 성별과 계급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셋째,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모두 중시하여, 가정의 아버지가 자녀에게 직접 교리를 가르쳐야 하며, 학교에서는 언어, 예술, 역사 등을 교육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넷째, 만인제사장설에 기초하여 모든 신자가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육의 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하였다.

루터는 교육의 세속적 가치 또한 인정하여, "설령 영혼도 없고 천국이나 지옥도 없고 오직 세속적인 세계만 있다고 해도 여전히 학교는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독일에서의 개신교 교육의 발달

루터의 주장은 개신교 신앙에 동조하는 군주들과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아 교육 재건 및 개혁 사업이 진전되었다. 공립학교들이 조직화되어 도시 이외의 지역까지 확산되었고, 국가의 재정지원과 통제를 받는 국립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김나지움으로 발전하여 현대 독일 중등교육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 교육 정착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필리프 멜란히톤이다. 그는 약 40여 년간 개신교의 신학적 기초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교육 분야에 관여하였다.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고전과 신학 강좌를 담당하여 이 대학교를 개신교 신학의 중심지로 성장시켰고, 문법, 철학, 논리학 분야의 교과서를 저술하여 18세기까지 각급 학교에서 사용되었다. 그는 또한 작센 공국의 학교 설립 정책에 기여하고 여러 대학교들의 협의체를 구성하였으며, 마르부르크, 쾨니히스베르크, 예나에 신학대학을 설립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그에게 '독일국민교사' 칭호를 추서하였다.

멜란히톤이 제시한 교육과정은 세 개의 단계로 편성되었으며, 라틴어 문법과 라틴 문학을 주요 교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교육체계는 모국어 교육을 경시하고 고전 언어의 형식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이후 3백여 년간 외국 문화 학습을 교육의 핵심 요소로 삼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요한 크리스토프 슈투름은 스트라스부르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10년제의 체계적인 학교 조직을 확립하였다. 그의 학교 모형은 북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이후 3개 세기 동안 인문주의 학교의 일반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슈투름의 교육에서도 언어의 형식적 훈련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역사, 수학, 과학 등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으로만 교육되었다.

칼뱅주의와 교육

장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전개하면서 독자적인 교육체계를 확립하였다. 칼뱅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 조례」를 통해 자신의 학교 구상을 구체화하였는데, 이 학교는 스트라스부르 김나지움의 여러 특징을 반영하면서도 모국어(프랑스어) 교육을 포함하고 키케로의 비중을 약화시키는 등 차별화된 요소를 지녔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개교 후 10년 만에 사학(예비과정)에 1,200여 명, 공학(고등과정)에 300여 명의 학생을 거느릴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칼뱅의 교육체계는 위그노, 네덜란드 개혁교회, 청교도, 장로교 등 광범위한 세력을 바탕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지도자 존 녹스는 칼뱅과 교류하며 「제일권징서」를 제정하여, 교회의 영향 아래 모든 계급을 위한 교육체제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녹스의 제안은 부유한 계급과 빈한한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 초등교육을 제공하는 보편교육을 지향하였으며, 일관된 국가 교육조직을 통해 학생의 능력에 따른 단계적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이 제안은 당시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부결되어 완전히 실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이후 스코틀랜드 교육의 길잡이가 되었다.

예수회의 교육체계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 측의 대응으로서 예수회는 독자적인 교육체계를 발전시켰다.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창설한 예수회는 가톨릭 교회를 종교개혁의 영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고등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가톨릭 세력이 강한 지역에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6세기 말경에는 가톨릭 국가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대부분이 예수회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예수회는 1599년 정식 교육과정 보고서인 「학습계획」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1832년까지 예수회 산하 모든 학교에서 효력을 가졌다. 이 교육과정은 슈투름의 방법과 유사하면서도 학년 수를 5개로 감경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함께 교육하며 모국어 교육도 일정하게 시행하는 등 개선된 점이 있었다. 예수회 교육의 중요한 혁신은 교원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교원 지망자는 내용적 측면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능력에 대한 시험을 지속적으로 보아야 했다.

18세기 중반까지 예수회의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우수성을 인정받았으나, 교육을 종교에 종속시킨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교육방법이 경직되고 보수화되었다. 18세기에 대두된 과학적 사고라는 시대정신에 적응하지 못하고 급속히 쇠퇴하였으며, 1773년 예수회가 탄압을 받으면서 거의 모든 예수회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의의와 영향

종교개혁기의 교육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첫째, 만인제사장설에 기초하여 교육의 대상을 소수 성직자에서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였다. 둘째, 국가가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공교육 개념을 제시하여 이후 의무교육제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셋째, 교육의 장을 교회에서 가정과 학교로 확대하였다. 넷째, 성경 중심의 신학에 기초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였다. 다섯째, 인문주의 교육과 종교 교육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동시에 언어 형식주의와 같은 문제점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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