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드 섬너(John Bird Sumner, 1780년 2월 25일 ~ 1862년 9월 6일)는 19세기 영국 성공회의 주교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였다. 그는 잉글랜드 워릭셔주 케닐워스에서 로버트 섬너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해나 버드는 저명한 노예제 폐지 운동가 윌리엄 윌버포스의 사촌이었다. 그의 동생 찰스 리처드 섬너 역시 윈체스터 주교를 지냈다.
섬너는 이튼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에서 수학하였으며, 1802년 모교인 이튼 칼리지의 조교로 복귀하여 학생들 사이에서 "크럼피티 섬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803년 성직 서품을 받았고, 1817년 이튼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으며, 1818년 옥스퍼드셔의 메이플더럼 교구의 담임 사제로 임명되었다.
1828년 체스터 주교로 서임되었으며, 재임 기간 동안 교구 내에 많은 교회와 학교가 건립되었다. 1848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승격되어 1862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하였다. 대주교로서 그는 상원에서 가톨릭 해방에 찬성표를 던져 교구 내 많은 성직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851년에는 하이드파크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열린 대박람회의 공식 개회 종교 예배를 주관하였다.
섬너는 복음주의파에 속했으며, 그의 저술로는 《창조 기록과 창조주의 도덕적 속성에 관한 논고》(Treatise on the Records of Creation and the Moral Attributes of the Creator, 1816)와 《그 본성과 수용으로부터 도출된 기독교의 증거》(The Evidence of Christianity derived from its Nature and Reception, 1821) 등이 알려져 있다. 고럼 사건(Gorham Case)에서는 엑서터 주교 헨리 필팟츠와 충돌하여 필팟츠가 그를 이단 지지자로 비난하고 교제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의회에서 이혼 법안을 지지했으나, 고인 아내의 자매와의 결혼 법안과 유대인 차별 철폐 법안에는 반대하였다. 또한 캔터베리 협회(Canterbury Association)의 회장을 역임하여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건설에 관여하였다. 1848년 왕립학회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섬너는 1803년 3월 31일 매리앤 로버트슨과 결혼하여 최소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내는 1829년 사망하였고, 섬너 자신은 1862년 9월 6일 서리주 애딩턴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애딩턴의 세인트 메리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런던 램버스에 있는 아치비숍 섬너 성공회 초등학교(Archbishop Sumner Church of England Primary School)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