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드롭 모틀리 [John Lothrop Motley, 1814년 4월 15일 ~ 1877년 5월 29일]
존 로드롭 모틀리는 미국의 역사가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네덜란드의 역사를 다룬 저술들, 특히 3권짜리 《네덜란드 공화국의 부흥》(The Rise of the Dutch Republic)과 4권짜리 《통일 네덜란드사》(History of the United Netherlands)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외교관으로서는 에이브러햄 링컨 행정부 시절 오스트리아 제국 주재 미국 공사를 지냈으며, 이후 율리시스 S. 그랜트 행정부 시절 영국 주재 미국 공사(세인트 제임스 궁정)로 근무했다.
생애 초기와 교육
모틀리는 1814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주 도체스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토머스 모틀리는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감옥 관리자이자 여관 주인으로 일했으며, 프리메이슨 회원이자 프랑스 혁명에 동조하는 급진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버지 토머스 모틀리와 삼촌 에드워드 모틀리는 1802년 보스턴으로 이주하여 위탁 판매 회사 "토머스와 에드워드 모틀리"를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보스턴의 주요 위탁 판매 회사 중 하나로 성장했다. 아버지 토머스는 저명한 매사추세츠 성직자 가문 출신의 존 래스로프 목사의 딸인 안나 래스로프와 결혼했다.
모틀리는 라운드 힐 스쿨과 보스턴 라틴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고, 13세의 나이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1831년에 졸업했다. 이후 1832년부터 1833년까지 독일 괴팅겐에서 학업을 계속했으며, 이 기간 동안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평생 친구가 되었다. 모틀리와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의 프레드릭 윌리엄 대학교에서 함께 민법을 공부했다. 유럽 여행 후 1834년 보스턴으로 돌아와 법률 공부를 계속했다.
문학 경력의 시작
1837년 모틀리는 부유한 보스턴 가문 출신의 메리 벤자민과 결혼했다. 1839년 그는 독일 대학 생활을 소재로 한 소설 《모턴의 희망》(Morton's Hope)을 익명으로 출판했으나 평은 좋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은 이후 젊은 시절의 비스마르크를 "오토 폰 라벤마르크"라는 이름으로 살짝 변장시켜 묘사한 귀중한 기록으로 재조명되었다.
1841년 모틀리는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국 공사관 비서로 외교 경력을 시작했으나, 혹독한 기후와 생활비 문제,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3개월 만에 사임했다. 보스턴으로 돌아온 후 그는 문학 경력에 집중하여 《북미 리뷰》(North American Review)에 여러 역사·비평 에세이를 기고했다. 1849년에는 두 번째 소설 《메리 마운트》(Merry Mount)를 다시 익명으로 출판했다. 그는 1856년 미국 골동품 학회 회원으로, 1861년 미국 철학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네덜란드 역사 연구
1846년 모틀리는 네덜란드 역사, 특히 연합주 시대에 대한 역사 저술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이용 가능한 자료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그는 1851년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떠나 드레스덴, 브뤼셀, 헤이그에서 5년간 기록 보관소를 조사했다. 그 결과 1856년 《네덜란드 공화국의 부흥》이 출판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책은 여러 판을 거듭했으며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1860년에는 속편인 《통일 네덜란드》의 첫 두 권이 출판되었고, 1609년 휴전까지를 다루는 추가 두 권이 1867년에 출판되었다. 이들 저작은 영국과 미국에서 대중적·비평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수십 년 동안 여러 판이 수만 부씩 판매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과도한 극화와 교훈주의, 그리고 프레스콧이나 파크먼에 비해 덜 집중적인 연구 방식을 지적하며 그의 작품의 지속력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내 평가도 전적으로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의 독립 투쟁을 매우 우호적인 시각으로 묘사한 점 때문에 반대편(가톨릭·스페인)에 대해 편향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정통 개신교 역사가인 기욤 흐룬 판 프린스터러르는 모틀리를 매우 우호적으로 평가했으나, 저명한 자유주의 역사가 로버트 프루인은 이야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사실"을 지어내는 경향을 비판했다. 또한 인문주의 역사가 요하네스 판 플로텐은 모틀리가 네덜란드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당시 네덜란드 역사학의 최신 성과를 반영하지 못했고, 개신교에 유리하고 가톨릭에 불리한 편향에 취약했다고 주장했다.
남북 전쟁과 외교 활동
1861년 남북 전쟁 발발 직후 모틀리는 《타임스》(The Times)지에 연방의 입장을 옹호하는 두 통의 편지를 기고했으며, 이 편지들은 《미국 남북 전쟁의 원인》(Causes of the Civil War in America)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으로 재인쇄되어 링컨 대통령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이로 인해 모틀리는 1861년 오스트리아 제국 주재 미국 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존 비글로,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등 다른 미국 외교관들과 협력하여 남북 전쟁에서 남부 연합 편에 유럽이 개입하는 것을 막는 데 기여했다. 그는 1867년 이 직책에서 사임했다.
1869년에는 그랜트 행정부 시절 영국 세인트 제임스 궁정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1870년 11월 그랜트 대통령에 의해 소환되었다. 이는 모틀리가 앨라배마 클레임 해결에 관한 해밀턴 피시 국무장관의 신중하게 작성된 지시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 원인이었다.
말년과 사망
네덜란드를 잠시 방문한 후 모틀리는 다시 영국으로 이주하여, 1874년 《요한 바르네벨트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of John of Barneveld, Advocate of Holland)을 2권으로 출판했다. 이후 건강 악화로 문학 활동에 지장을 겪었으며, 1877년 5월 29일 영국 도싯주 도체스터 인근의 킹스턴 러셀 하우스에서 사망했다.
주요 저작
- 《모턴의 희망》(Morton's Hope, 1839)
- 《대제 피터의 삶과 성격》(Life and Character of Peter the Great, 1845)
- 《메리 마운트》(Merry Mount, 1849)
- 《네덜란드 공화국의 부흥》(The Rise of the Dutch Republic, 3권, 1856)
- 《통일 네덜란드사》(History of the United Netherlands, 4권, 1860~1867)
- 《미국 남북 전쟁의 원인》(Causes of the Civil War in America, 1861)
- 《요한 바르네벨트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of John of Barneveld, 2권, 1874)
평가
모틀리는 19세기 앵글로색슨 세계에서 네덜란드 역사를 널리 알린 대중 역사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는 큰 인기를 누렸으나, 이후 현대 학자들에 의해 네덜란드 공화국의 역사가 크게 다시 쓰이면서 일부 내용의 정확성과 편향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동시에 그의 외교 활동, 특히 남북 전쟁 시기 유럽의 개입을 막는 데 기여한 공로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