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그렌빌
조지 그렌빌(George Grenville, 1712년 10월 14일 ~ 1770년 11월 13일)은 18세기 영국의 휘그당 정치가로, 1763년부터 1765년까지 영국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생애와 배경
조지 그렌빌은 잉글랜드 버킹엄셔의 우턴 언더우드에서 정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리처드 그렌빌, 어머니는 헤스터 템플(훗날 제1대 템플 백작부인)이다. 그는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학위를 취득하지는 않았다. 누나 헤스터가 훗날 총리가 되는 윌리엄 피트(제1대 채텀 백작)와 결혼하여, 그렌빌은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렌빌은 1741년 버킹엄 선거구의 하원 의원으로 처음 의회에 진출했으며,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약 29년간 동일 선거구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로버트 월폴에 반대하는 파벌에 속했으며, 코바미트(Cobhamites)로 불리는 젊은 의원 집단의 일원이었다.
정치 경력
그렌빌은 1744년 해군성 장관, 1747년 재무성 장관, 1754년 해군 재무관을 역임했다. 1757년부터 해군 재무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7년 전쟁 기간 동안 그 직위에 있었다. 1761년 윌리엄 피트가 사임한 이후 하원 여당 대표가 되었고, 1762년에는 북부 국무대신, 같은 해 후반에는 해군 제1경을 역임했다.
총리 재임(1763~1765)
1763년 4월, 그렌빌은 사임한 뷰트 백작의 뒤를 이어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그의 조건은 뷰트가 정치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렌빌 정부의 가장 주요한 과제는 7년 전쟁으로 인해 누적된 국가 부채 문제였다. 1763년 당시 영국의 국가 부채는 약 1억 2,200만 파운드에 달했으며, 연간 이자만도 440만 파운드 이상이었다. 그렌빌은 이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과세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정부는 1764년 설탕법(Sugar Act)을 통과시켰고, 1765년에는 인지세법(Stamp Act)을 제정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의 문서와 신문 등에 인지세를 부과했다. 인지세법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이후 미국 독립 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군인 숙영법(Quartering Act)도 통과시켰다.
국내 문제로는 급진 개혁가 존 윌크스(John Wilkes)에 대한 강경한 대응이 있었다. 그렌빌 정부는 윌크스가 발행한 신문 《노스 브리튼》의 국왕 비방 기사를 문제 삼아 그를 기소했는데, 이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정부의 위신을 손상했다.
그렌빌은 국왕 조지 3세 및 동료들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으며, 특히 섭정법 문제를 두고 국왕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1765년 7월, 조지 3세에 의해 파면되었고 제2대 로킹엄 후작이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 이후
파면 이후 그렌빌은 다시는 공직을 맡지 못했으나, 의회 내에서 지지 집단을 이끌며 반대파로 활동했다. 1768년에는 윌리엄 피트와 재결합하여 협력 관계를 회복했다.
그렌빌은 1770년 11월 13일 런던에서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58세였다. 이후 사체 검시를 진행한 존 헌터의 연구 표본 분석에 따르면 그는 다발성 골수종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족
그렌빌은 1749년 엘리자베스 윈덤과 결혼하여 4남 4녀(일부 기록에 따르면 5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 윌리엄 그렌빌은 훗날 1806년부터 1807년까지 영국 총리를 역임했다. 또한 장남 조지는 훗날 제1대 버킹엄 후작이 되었다.
유산과 평가
그렌빌은 작위를 받지 않은 드문 영국 총리 중 한 명이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시행된 식민지 과세 정책은 미국 독립 혁명의 직접적 원인으로 평가된다. 그의 정책은 당시 하원의 합의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식민지의 반발 규모를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캐나다 퀘벡주의 그렌빌(Grenville) 지명과 그렌빌 조산운동(Grenville orogeny)의 명칭은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